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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츠카] 킬 유어 달링 - 上

엘리스.aliceeli 2016. 11. 7. 16:57

[레오츠카] 킬 유어 달링.

* 정하님과 어구님과 함께한 레오츠카 연성 사다리타기,

제 주제는 : 수갑 이었습니다.

* 설정 날조 주의, 

유메노사키를 졸업한 이후의 이야기. 츠카사는 대학에 다니고 있고, 레오는 다니고 있지 않습니다.

* 레오가 많이 아파요. 건강하고 밝은 분위기가 아닙니다.





살갗으로 스며드는 햇볕이 따스했다. 자꾸만 저를 보라는 듯 보채는 손을 지닌 태양의 따사로운 쓰다듬을 느끼며 스오우 츠카사는 창밖의 풍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느 미술관이라도 외벽 한켠을 내어주었을 법한 그럴싸한 풍경화와 같이 평화로운 정경을 본다. 혹은 우유부단한 화가가 매일 밤 고쳐 그리는 그림처럼 풍경은 흐릿한 구름을 입었다가도 벗어내면서 변덕을 부리고 있어, 창문틀에 고정된 캔버스는 도무지 완성될 기미라곤 보이지 않았다.

햇볕이 쨍하다. 스오우 츠카사는 그만 생눈으로 태양을 마주했다가 눈살을 찌푸리고야 말았다. 시큰거리는 눈꺼풀 안으로 햇볕이 아른거렸다. 크게 부풀었다가도 꺼져간다. 눈꺼풀 안에서 소행성 하나뿐인 우주가 몇 번이고 파괴되고 재생된다. 볕이 뜨겁다.

볕은 자꾸만 온몸으로 제게 부딪쳐온다. 머리를 제멋대로 어루만지고, 뺨에 문지르고, 귓불을 쪼아온다. 볕은 제멋대로 굴기가 폭군의 뺨을 치고, 스오우 츠카사는 그 앞에서 비굴해진 구걸꾼처럼 고개를 숙이며 걷는다. 지나는 이들은 저마다 손목과 매끄러운 선의 목덜미를 옷 위로 한껏 드러내고선 거리를 거닌다. 모두가 외투를 벗어 던지고 봄볕의 따스함을 가장한 햇볕의 입김을 즐기고 있다. 스오우 츠카사는 주저하듯 소매를 한단 접었다가 곧 원상태로 만든다. 턱 끝까지 올라온 스웨터의 까끌까끌한 감촉을 느끼며 묵직한 숨을 뱉었다. 그 묵직한 숨의 진한 밀도.

배광성의 식물처럼 그는 응달을 찾아 걸음을 분주히 옮겼다. 어미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젖먹이마냥 그는 그늘만을 찾아 빠르고 또 빠르게 발을 옮겨내었다. 발밑으로 타닥이는 낙엽소리가 들려왔다. 이 낙엽에서 저 그늘로, 그 그늘에서 다시 낙엽으로 발이 옮겨붙는다.

캠퍼스를 빠져나오며 몇 번인가 아는 얼굴들을 마주쳤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것도 몇 차례 되지 않아 마주치는 일을 피하기 위해 시선을 바닥으로 고꾸라트리고 걸었다. 누구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한시라도 집에 도착해 이 갑갑한 스웨터를 벗어버리고 싶었다. 누구도 털실 밑에 숨은 지독한 구속을 눈치채지 않았으면.





문고리에 열쇠를 집어넣기도 전에 손잡이가 경쾌한 쇳소리를 들려주며 몸을 동그랗게 말며 춤을 췄다. 삐걱이는 경칩 소리에 맞춰 문소리와 어긋나는 쇳소리 사이로 뱀의 혀처럼 재빠르게 튀어나와 멱살을 움켜쥐는 손이 보였다. 살짝 벌려진 문틈 사이로 스오우 츠카사의 몸이 황급히 먹혀들어갔다.

품에 안겨있다. 센서가 망가진 형광등은 미동조차 없이 캄캄한 어둠을 수호하고, 신발에서 묻혀왔을 잔모래들이 손끝을 자꾸만 쪼아대는 바람에 따갑고, 꺼끌꺼끌했다. 등으로 전해지는 온기는 무척이나 따스했지만, 제 허리와 손목을 옥좨오는 손아귀에선 상냥함이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었다. 숨통이 끊겨버린 짐승처럼, 맹수의 잇새에 짓눌리며 낭자한 선혈만을 두른 날짐승처럼, 아귀에 붙들린 채 스오우 츠카사는 그저 숨만을 간간히 내쉬고 있었다.

그는 제 몸 중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눈동자만을 굴려가며 방안을 응시했다. 먹물 같은 어둠이 한차례 끼얹어진 후였기에 방안의 사물들을 온전히 분간하는데는 긴 시간과 섬세한 지긋한 관찰을 요했다. 약간 옅거나 지나치게 깊은 농도의 묵들이 한데 엉키거나 서로의 경계에서 몸을 섞는 바람에 번져버린 풍경을 꼼꼼히 살핀다.

여느 때처럼.

풍경은 흔적을 남긴 채 고요하다. 방금전까지 따뜻한 온기를 가진 이를 품었을 이불은 나비가 빠져나간 번데기처럼 속은 텅 빈 채로 부풀어 올라있고, 마시다가 흘린 건지 실수로 쏟은 것인지 고의로 엎은 것인지 분간이 안 가는 물이 작은 샘처럼 고여있는 바닥, 그 옆에 나뒹구는 이가 나간 컵, 컵에서 빠져나온 별처럼 잔존하는 사금파리, 그 옆으로는 떨궈진 베개와 몇 가지의 펜과 전화선이 뽑힌 전화기와 검은 화면만 송출할 뿐인 텔레비전,

그리고 목덜미를 깨무는 그의 이, 스오우 츠카사는 몸을 움츠린다. 성긴 꼬임의 스웨터였기에 천 위로 닿는 그의 이를 선명히 느낄 수가 있었다.

“스오.”

츠카사는 고개를 떨군 채 약한 떨림만을 정교한 몸선으로 그려낼 뿐이었다.

“스오.”

그가 다시 목을 문다. 털실 위로 곱게 침을 바른다. 털실은 금세 축축해지고, 습하고 달뜬 그의 입김이 츠카사의 목 위로도 덮여 쓰여진다.

“스오.”

“네.”

그는 만족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방금 전까지 제가 침을 열심히 펴발렀던 스웨터라는 걸 잊은 모양인지, 잊은 양 구는지, 그 위로 열심히 뺨을 비벼온다. 츠카사는 얌전히 품에 안긴 채 허공에 시선을 걸어둔다. 자잘한 먼지들이 제멋대로 자유롭게 부유하며 투명한 소음을 빚어내고 있었다. 꼭 민들레 홀씨 같아, 나지막이 중얼거리다 이 계절에 민들레 홀씨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리란 사실을 깨닫는다. 뭣보다 이 방은 너무 어둡고, 어둠이 몰고 온 커튼이 사방팔방 온갖 군데를 다 가리고, 창을 감춰두어서 빛이 새어들 틈이라곤 손톱 조각만큼도 없었다.

미지근한 손이 허리를 어루만져온다. 손톱을 세워 살갗을 긁는다. 작게 신음하면, 그가 낮은 목소리로 웃었고, 웃음소리에 맞춰 손놀림은 점점 진해지고, 살갗을 파고드는 손톱의 깊이감도 깊어져 갔다.

“아, 아파요.”

울음에 절여진 목소리가 벌려진 입술 사이로 침과 함께 떨구어졌다. 어둠 속에서도 왜 침은 빛이 나는 걸까, 제 가슴팍과 입술을 이으며 빛나는 여러 줄기의 투명한 침을 보며 그는 눈을 깜빡, 깜빡였다.

분명 그의 귓가에 선명하게 목소리가 닿았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아랑곳없이 또 한 번 그의 목을 성급하게 물어온다. 얇디얇은 연한 살갗 하나만이 제 내부를 보호하는 껍질의 전부일 그의 몸에 거칠게 이를 박는다. 침이 엉기고 단단한 이에 눌려 새빨개진 목덜미를 사과처럼 먹어 치우려 한다. 그가 목을 깨물 때 스오우 츠카사는 제 입술을 깨물고, 다시 한 번 목이 새빨갛게 물든다. 그의 송곳니가 박혔던 목에 지나치게 농익어 헐어버린 과일의 멍이 떠오른다.



컴컴한 동굴 같은 방에서 맞이하는 오전 7시도 밤, 오전 11시도 밤, 하늘에 해가 수놓아지고 별이 수놓아지고 달이 수놓아져도 오로지 밤뿐이다. 밤 속에서 스오우 츠카사는 아침을 찾는다. 제 몸을 단단히 구속한 팔을 조심스레 풀어헤치고, 품속으로부터 달아나자 시린 공기가 살갗에 부딪혀왔다. 옅은 추위에도 몸은 겨울바람 앞에 내쳐진 여윈 가지처럼 발발 떨었다. 품어준 이의 온기가 따스했기에 더더욱이.

이불 속에서 빠져나온 그가 몇 발 디디지도 않았는데 발가락 사이로 축축한 물기가 파고들어 왔다. 간밤에 미처 정리하지 못한 방 속에서 발이 젖어간다. 눈살 한 번 찌푸리는 일도 한숨을 쉬는 법도 없이 스오우 츠카사는 자연스럽게 바닥의 물을 닦는다. 젖어들어 간 제 발은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조용히 숨죽여가며 방바닥을 닦고, 이 빠진 컵이 소리 내지 않도록 달래가며 버리고, 컵이 뽑아버린 날카로운 이들을 치우고, 펜을 줍고, 종이를 한데 가지런히 모으고, 텔레비전의 전원까지 껐지만, 전화선만큼은 꼽지 않았다. 그저 잘 묶어 그의 눈길이 닿지 않게끔 테이블 뒤로 숨겨놓았을 뿐이다.

전화선 끝에 붉은 얼룩이 보인다. 그의 손끝으로부터 배어 나온 도료다. 언제 손끝이 베여버리고 만걸까, 불안감에 손톱을 물어뜯는 아이처럼 그는 초조하게 손가락을 입에 문다. 입안에 쇠 맛이 감돌았다.

자박이는 발소리를 더 죽여가며, 마치 촉수만으로 온몸을 지탱하는 생물처럼 느릿느릿 기어가듯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입에 물고 빨았는데도 손끝의 상처는 선명해지고 피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학교에 가는 길에 약국에 들러 대일밴드를 사야겠다, 생각한다.

피가 묻지 않도록 조심하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옷을 챙겨 든다. 갓 태어난 아기처럼 발가벗겨진 몸 위로 천천히 옷을 덮어씌운다.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린다. 제 옷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스오.”

잠에서 깬 그가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며 헝클어트린 이불이 소리의 근원지임이 분명했다. 이불은 작게 속닥거리며 제 몸을 구겨낸다.

“어디가?”

“학교에 가요.”

“거짓말.”

남은 팔을 마저 옷에 끼운다. 바지를 주워 입으려는데 그가 갑작스레 달려와 몸을 덮쳤다. 넘어트린다. 그로 인해 츠카사는 크게 휘청거리며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바닥과 무릎이 부딪치는 둔탁한 소음 뒤에 고통스런 신음이 따라붙었다. 츠카사는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참아 보인다. 목으로부터 앓는 소리가 먹먹한 고동 소리와 닮았다. 바닥에 쓸린 무릎이나 허벅지가 후끈후끈 거렸다.

성급하게 제 품에 안겨든 그의 머리가 보인다. 가슴에 고갤 처박고, 뺨을 눌러오는 그의 정수리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제멋대로 가는 몸을 흔들며 비트는 털실처럼 머리칼들은 이리저리 뒤엉켜 꼬여있고 떡이 져 있다. 그는 손을 들어 조심히 손바닥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바닥 안이 기름 떼로 금세 눅진눅진해졌다.

“죽어버릴 거야.”

“정말로 학교에 가요.”

“날 버리고 가는 거지? 그렇지?”

“다녀올게요. 금방 돌아와요.”

“날 버리는 거야, 혼자 두고 갈 거야.”

자꾸만 미어져오는 가슴으로 그는 한숨을 삼킨다. 손을 많이 타는 그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고, 손바닥으로 비비며, 제 온기로 품어주며 그는 다시 한 번 욕지기처럼 솟구쳐 올라오는 한숨을 삼키고, 눈을 감는다. 시야를 차단한다. 어둠 속에서 제 입술을 더듬어오는 혀의 감촉을 보다 선명히 느낀다.

스오가 가면 죽어버릴 거야, 제 목을 조르는 나지막한 음성을 향해, 어디에도 안 갈게요, 제 혀끝으로 스스로 말을 토해 구속한다. 그의 팔이 다시 한 번 제 몸을 붙들어온다. 품은 따뜻했지만, 자꾸만 뺨 위로 소름이 듣는 연유는 무엇일까. 멋대로 돋아난다. 마치 계절을 착각한 새순처럼 그의 입맞춤에도 몸을 떨었다. 자꾸만.




석양이 붉다. 중천에 걸려있던 해는 어느샌가 지평선으로 달음박질치고, 세계의 온갖 선들은 붉은 안료를 덮고 있다. 거듭 덧칠되듯 색이 발갛고 진했다. 금세라도 불타버릴 듯 빛나는 세계의 면들을 보던 스오우 츠카사는 다시 커튼을 내렸다. 방안은 살풍경하고 쉽사리 정이 가지 않았다. 횡횡한 풍경에 그럴싸한 가구도 없어 정을 붙일만한 물건도 없었다. 방금 전까지도 이 방에서 체온을 나눈 이와 함께하고 있는 와중에도 벌레처럼 제 몸 위를 기어오르는 소름을 막을 길이 없었다.

소매가 토해낸 손은, 손목은 감푸름한 얼룩이 들어있었다. 너무 오랜 시간 감은빛 속에 잠겨있었기에 물이 든 걸지도 몰랐다. 밤 속에 사는 그가 선명히 스며든 흔적이다, 단단히 뭉쳐있는 시퍼런 멍을 제 지문으로 훑어본다. 어떻게 붙잡아왔는지, 손가락 자국이 훤했다.

그가 제게 비비고 문지르고 멋대로 새기고 간 지문들은 한데 뭉친 포자처럼 푸르게 피어났다. 언젠가 제 온몸을 점령할지도 모른다, 자꾸만 제 살갗 위로 피어나는 멍들을 보며 스오우 츠카사는 얕고 작게 신음하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때아닌 두통으로 머리가 아팠다. 아프다.






푸르무레한 멍이 강아지의 얼룩무늬처럼 자연스럽게 달라붙은 뺨을 지닌 그가 자신을 보며 웃는다. 푸릇한 이파리를 가진 꽃이 팔뚝 위에 피어났다, 솟아오른 힘줄을 따라서 팔 하나가, 그의 몸 전체가 푸르거나, 불그스름하거나, 파랗고 붉은 잎을 한 번에 뱉어낸 기형의 꽃밭 천지였다. 그를 한 송이로 치자면 틀림없는 기형이다. 기형의 꽃은 제 생김새만큼이나 제게 걸맞은 기행을 내비친다.

병실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발바닥 밑에서부터 유리가 씹히는 소리가 들렸다. 드나든 이의 발자국을 따라 세월을 고스란히 담아낸 회색의 대리석 바닥 위로 유리조각들이 불규칙적으로 널브러져 있다. 마치 맞춰보다 내팽개친 모자이크 조각처럼. 어느 곳은 선명하게 떠오르는데 어느 곳은 잔 빗금이 무더기로 달려들어 안개를 뜯어먹는 통에 바닥의 빛이 선명하게 들어오지 않았다.

츠카사는 꽃에서 무엇인가 말을 걸어야 한다고 거듭 스스로에게 되뇌며, 입을 열 때는 입술에 침을 바르고, 다물 때면 혀 위에 간간이 성긴 침들을 애써 목구멍 뒤로 넘기었다. 목구멍이 바싹바싹 말랐다.

꽃은 굴광성의 식물처럼 햇볕을 향해 고개를 돌린 채 열을 쬐고 있었다. 살짝 열어둔 창문 틈새로 바람이 들어올 때면 기꺼이 제 꽃잎을 내어주어 멋대로 나부끼게끔 방치했다. 꽃잎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팔랑팔랑 거렸다. 사이로 수술같은 속눈썹이 보였다, 콧날선이 보였다, 바싹 말라 껍질이 튼 입술이 보였다, 천천히 오르내리는 목울대가 보였다, 그 아래에 짓무른 자색 꽃과 그 옆으로 붉은 꽃잎이, 가지 겨드랑이에 멋대로 기생하며 피어오른 액화처럼 살갗 위로 떠오른 빗장뼈 옆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사과도 참회도 철회도 어울리지 않았다. 발밑으로부터 유리가 으깨지는 소리가 날 때면 몸을 주춤거렸고, 그때마다 톱니 같은 밑창으로 유리 조각이 박혀 들어왔다. 남은 유리들은 곱게 빻은 설탕 가루처럼 변하거나 버려진 우박처럼 나뒹굴었다.

할 짓 없어 골목 입구를 배회하는 똥강아지처럼 스오우 츠카사는 우박과 설탕 가루 위를 배회했다. 발이 설탕을 씹는다. 그가 마른 손목을 들어 손가락을 입에 문다. 손가락을 핥는가 싶으면 이를 드러내 손톱이 아닌 입술을 깨물었고 질리면 입술의 껍짓을 벗겨냈다. 입술 사이로 핏방울이 번진다. 붉은 피가 저물녘 창가에 박힌 성에처럼 고여있다.

“아.”

돌연히 그의 목소리가 제 얼굴에 꽂혔다. 눈을 커다랗게 떳다가 곧 깜빡, 깜빡, 거리더니 환히 웃었다. 그의 연푸른 눈빛이 전조등처럼 눈앞에서 자꾸만 깜빡깜빡거렸다.

“스오! 기다리고 있었어.”

그가 제멋대로 말을 시작한다.

“여기 이상해. 집에 가고 싶다는데 자꾸 안 보내줘. 내가 다쳤다는데 하나도 안 아프고 말이지?”

제가 다가가지 않았기에 침대 밖으로 뛰쳐나온 그가 달려들었다. 양팔이 붙들린 채로 츠카사는 멍하니 제 발밑만 바라보고 있다. 바닥에 굴러다니던 설탕들은 어느샌가 붉은 색소를 제 몸에 끼얹었다. 그들은 이제 설탕이 못 된다. 우박마저도 시붉게 변했다. 간간이 우박 위에 드리워졌던 안개들 조차도 샛붉게 물들어 안개라기보단 석양에 가깝다. 어느 곳은 너무 깊게 도료에 물들어버리는 바람에 깊은 어둠을 지녔다.

“내가 너무 늦어서 데리러 온 거지? 그렇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연결시킬 셈일까, 제 맘대로 물들이는 바닥만큼이나?

“네.”

그가 환히 웃는다. 푸른 무늬가 웃음소리를 따라 세차게 일렁였다. 삽시간에 만개했다가도 곧 죽어가듯 시든다. 꽃은 시들어도 이파리를 떨궈내지 않았다.

저 잎이 다 질 때까지, 그때까지만……. 스오우 츠카사는,

생각한다. 꽃이 모두 져버릴 날까지만 참으면 된다고. 그러면 된다고 중얼거리고 곱씹어보지만, 그의 몸에서 저물어버린 꽃들은 어느샌가 멋대로 제 몸에 들러붙어 뿌리를 내리고 푸른 잎사귀를 달고, 파랗고 붉게 봉오리를 맺어간다. 이따금 만개했다. 꽃이 피는 것은 삽시간이었지만, 저물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보름달이 한번 피고 질 때까지의 시간이. 달이 부풀 때면 꽃도 잘 여물었다, 지나치게 자라난 꽃잎은 진물처럼 흘러내렸다.

하루하루 꽃들은 어느샌가 제게 기생하기 시작했다.



조용한 밤에도 뿌리를 뻗어가며 축축한 흙들을 더듬는 줄기와의 몸짓처럼 제 몸을 타고 오르는 피를 느낀다. 숨을 느낀다. 허공의 숨들을 가슴에 가둔 채 조용히 발을 옮겼다. 침대에 누워있는 그와 최대한 멀리 떨어져 현관에서 부랴부랴 옷에 몸을 끼웠다. 신발마저 제대로 신지 못한 채 현관문을 열고 문밖으로 조용히 기어나간다. 맨살에 닿는 시멘트 바닥이 시리다. 삼동설한처럼.






3일 만의 귀가였지만, 누구도 그의 등장에 개의치 않았다. 그만큼 늘 있는 일이었기에 이제는 삶처럼 변해버린 외박들에 대해선 그 누구도 군말을 던져주지 않는다. 여전히 부모님은 바쁘고, 얼굴을 볼 수 있는 날들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 날들은 마치 공휴일처럼 변함없고 듬성듬성히 박혀 있다. 예정대로라면 부모님들은 자정을 넘긴 심야나 새벽이 될 내일 도착할 터였다.

스오우 츠카사는 조용히 걸음을 옮긴다. 방으로 돌아가 잠깐만이라도 편히 누워 눈을 붙이고 싶었다. 제 몸이 하나의 습지처럼 느껴졌다. 퀴퀴한 냄새가 치솟는다. 따뜻한 물에 들어가는 건 나중으로 미뤄도 괜찮지 않을까, 잠깐의 틈, 그는 결국 욕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의 지문이 잔뜩 배여들은 탓에 짓무른 꽃잎 같은 머리칼을 닦기 위해. 제게서 그의 손길을 뜯기 위해서. 나무줄기 벗기듯 그가 만진 몸을 벗기고 싶다.


검푸른 꽃이 목덜미부터 하나, 둘, 어떤 꽃은 희푸르고, 색이 덜 들어간 탓에 옅게 떠오르고,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기보단 겨우내 그 살갗을 붙들고 있단 말이 어울릴 정도로 색이 가냘팠다. 수 갈래로 뻗어가는 꽃봉오리들은 그 색채만큼이나 모양도 가지각색이다. 푸른 꽃 사이로 잔 실금들로 새겨진 가는 잎의 꽃이 보인다. 손톱자국이다. 가는 꽃은 손톱이었고, 푸른 꽃은 그의 지문들의 군집, 어딘가는 손금이 새겨졌을지도 모른다. 또 어딘가는 그의 이가 성큼 다가온 탓에 짓무르고.

그의 아귀에 붙들릴 때마다 몸에는 졌던 꽃이 다시 피어오르고, 꽃물이 번졌다.

거울에 비치는 몸이 꼴 보기 싫어 욕조 안으로 황급히 들어갔다. 투명한 물속에서도 꽃들은 선명하게 보였다. 선연히 도드라지는 꽃들은 부평초처럼 눈앞에 떠돌아다닌다. 허벅지에 새로 피어난 꽃을 들여다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는 눈을 감았다. 거짓말처럼 기억이 끊겼다.






지나치면 독이 된다. 몸에 좋은 약이라도 정도가 지나면 오히려 숨통을 조여온다. 하물며, 제가 좋아 씹어먹기 시작한 손톱도 목구멍에선 제멋대로 돋아나는 가시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데 강요받는 애정과의 수태는 무슨 말이 필요할까.

생각한다. 생각 위에 생각이 쌓인다. 하늘에서 내린 눈 위로 눈이 덮이듯이.

1을 말하면 그는 10을 구해온다. 10을 쥐여주면 100이 아니라고 뿌리쳐버린다. 그렇다고 100을 주면 그는 다시 100을 던져버리고, 다시 1을 주면…… 아무리 나눠도 자꾸만 따라붙는 나머지처럼 마음을 나누고 나누어도 그의 욕구가 따라붙는다.

끝이라곤 없는 줄다리기처럼 위태로운 간극만을 지킨다. 우리의 간극 사이로 쌓이기 시작한 고민은 한숨에도 나부끼지 않고, 오랜 시간 쌓인 먼지처럼 엉기고 커다래지고 도무지 닦아내고 닦아내도 자꾸만 남아 결국엔 손끝에 지문처럼 끈끈하게 달라붙는다.

손끝엔 쉬이 떨쳐지지 않는 고민이 붙어있고, 머리 위론 벚꽃이 내렸다. 어깨에 쌓인다. 바람 부는 소리에 맞춰 머리카락에 제멋대로 홀겹의 입술을 부비곤 발밑으로 서서히 추락했다.

만개하나 싶으면 삽시간에 흐드러지고 꽃은 힘을 잃은 채로 서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천길만길 낭떠러지 아래로, 그것이 제 죽음인 줄도 모르고 원 없이 피었다가 죽어버렸다.

제멋대로 피어올랐다 못내 꺼져버리는 꽃을 보다가, 그의 눈가에 달라붙은 벚꽃을 눈여겨 주시하다, 꽃이 모두 떨어져 발가벗은 나무 아래서 말했다.

“그만둘까요?”

“어째서? 꽃이 이렇게 예쁘게 지고 있는데.”

“곧 져버릴 테니까요.”

꽃이 죽는다. 자꾸만 가지는 꽃들을 뚝 뚝 떨어트린다. 먼지처럼 가벼워 손바닥에 한 아름 품어도 무게 따윈 1g도 느껴지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사지를 축 늘어트린 가지들은 꽃들을 자꾸만 죽였다. 하물며 무겁다면 더더욱이 쉽게 죽이고 싶어지는 게 누구나의 마음이 아닐까.

“꽃은 질 때가 예쁘잖아.”

꽃놀이 이야기가 아니다.

“져버리면 소용없어요.”

그 역시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죽을 거야.”

수북이 쌓인 꽃 머리들을 밟아 으깨며 그가 말했다. 여린 꽃잎들이 으깨지며 짓무르고, 비명 같은 향기를 내질렀다. 새하얀 눈처럼 소복하게 부풀어있던 꽃무덤 곳곳에 그의 발자국이 찍혔다. 꽃들의 맥없는 질식사.

“이미 죽었어요.”

꽃이, 하고 음성을 덧붙이는데 말끝에 따라오는 건 그의 시선의 묵직함과,

“꽃 이야기가 아닌데, 스오.”

시린 음색이 그의 입술 사이로 숨결처럼 퍼진다. 나무 아래로 으스러진 꽃들은 짙은 그늘처럼 보였다. 햇볕에 노출된 풍경 속에서 모두가 천천히 산화된다. 색들이 짙어져만 간다.

“죽을 거야.”

꽃이 죽는다. 자꾸만 가지는 제게서 꽃을 떨어트리기 위해 꽃의 목을 뎅강, 뎅강, 자른다.

“살아갈 장소가 버리면.”

미련 따위는 없다는 듯이 나무가 제게 눈처럼 쌓인 꽃들을 가루 털어내듯.

“천천히 죽을 거야.”

밀쳐진 꽃잎이 바닥 위로 나뒹굴었다. 여윈 가지는 가뿐한 몸으로 잔바람을 휘감고 있다. 비쩍 곯아 곧 거스러미같은 껍질이 피어오를 가지 위로 느릿느릿 땅거미가 내려앉을 때,

그늘 속으로 솟구치던 노을 한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