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스타

tragédie - 7

엘리스.aliceeli 2016. 11. 7. 16:55

tragédie - 7


*왕궁물로 레오츠카 가 보고 싶어서 쓰기 시작한 글. 

설정 파괴 날조 주의!





첫날부터 성대한 환영을 받고야 말았다. 귀환한 당일 정도는 편안히 쉬게 해줘도 시간이 모자를 일은 없을 텐데, 앞으로 얼마든지 제 명줄을 딸 시간이 손바닥에 차고 넘치다 못해 발등을 적실 정도로 주어질 텐데. 텐쇼인 에이치는 제 머리맡에 두었던 칼을, 근 십 년간 잊고 지냈던 섬뜩한 날의 감촉과 금속성의 소리를 느끼며 가만히 방구석에 서 있었다.

궁으로 돌아오자 거짓말처럼 재발한 불치의 불면을 느끼며 그가 속으로 조용히 자장가를 외고 있을 때, 기별 없이 문이 열렸다. 처음에는 그 존재가 스오우 츠카사일거라 막연히 예상했다. 갑작스레 바뀐 잠자리에 뒤척이느라 저를 찾았을지도 모른다고, 잘 자라는 인사를 나누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없던 불안과 낯선 공간에 갇힌 이질감이 그의 발을 제 방앞으로 이끌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반가움이 일었지만, 제게 방문한 이는 그리 반길 사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갑작스런 심야의 불청객이 떠나간 방안에서 텐쇼인 에이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칼을 쥔 손에 힘을 더한다. 저벅 이는 발소리가 들렸다. 한 명으로는 모자랐을 테지, 분명 둘, 아니 서넛은 더 붙여두었을지도 모른다. 숨을 죽이고 제 숨통을 노릴 이가 목전에 다다르길 기다렸다. 문이 열렸다. 실로 조심스레. 그가 칼을 상대에게 내리꽂기 위해 팔을 들었을 때,

“텐쇼인 형님……?”

낯선 음성이 들렸다. 그 목소리가 닿자마자 몸의 힘이 전부 빠져나가 버리고 말아, 그는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형님……?!”

“츠카사……. 너로구나.”

“무슨 일이세요? 심장이 또 아프신가요? 답답해지셨나요?”

“아니,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저를 걱정하는 목소리를 듣자 가슴에 들어차는 안도감이 단단한 힘이 깃들어있던 손아귀를 느슨하게 만들었다. 이제 안심해도 된다는 듯 마음이 허물없이 저를 안심시키는 바람에 손으로부터 떨궈진 검이 싸늘한 바닥과 부딪치며 챙강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 잔음들이 제멋대로 퍼지며 허공의 고요를 산산조각 찢어발긴다. 제 귀를 사납게 찔러오는 차가운 금속성의 소리에 츠카사는 황급히 걸음을 옮겨 텐쇼인 에이치의 곁에 다가섰다. 제 발을 장애물처럼 가로막고 서 있는 반짝이는 날을 확인한 순간, 서둘러 방을 밝히기 위해 촛대로 다가섰으나,

“불은 키지 말아줘.”

하고 에이치가 만류했다.

“하지만, 텐쇼인 형님,”

“그래, 불은 됐으니까 이리 가까이.”

그가 조용히 손을 내밀고 있었다. 가지런한 손가락만이 달빛 속에서 허옇게 빛났다. 손바닥 안에 응달이 고여있다. 검고 작은 샘. 색 하나 가미 되지 않아 그저 짙은 농도의 묵을 풀어 그린 그림처럼 그는 허옇게 질린 낯으로, 엷은 그늘만을 채색한 손가락으로 스오우 츠카사를 부르고 있었다.

하얀 백지라고만 생각되던 그의 가슴께에 선 붉은 꽃이 하나 피어있다는 사실을, 몇 걸음도 남지 않은 거리에서 깨달은 츠카사가 황급히 그에게 달려왔다. 그의 가슴께를 어루만지며,

“피, 피?! 형님!”

하고 놀란 목소리로 당황하고 있다. 저 때문에 평정을 잃고 무너지는 그 모습이 어쩐지 행복하고 기쁜 마음을 불러들였다. 텐쇼인 에이치는 웃음이 어린 목소리로 인자하고 차분하게 “그건 내 피가 아니야.” 하고 말하고,

“무슨 말씀을! 옷에도 이렇게 피가 묻어있는데……!”

츠카사는 성을 내보인다. 마치 제 꼴을 보란 듯이, 이 꼴을 보고 그 누가 믿겠냐며, 무어라도 꼬투리를 잡아 타박하려는 양 군다.

“아, 아아. 그렇구나. 묻어버렸구나.”

그제야 텐쇼인 에이치는 시선을 내려 제 앞섶을 바라본다. 생각보다 선명하고 짙은 피가, 어느샌가 가장자리가 검게 시들어가기 시작한 꽃을 향해 중얼거린다.

“형님……?”

“도깨비, 도깨비가 뿌리고 간 거야. 츠카사도 알지? 동화에 나오는 도깨비가……”

“형님.”

“정말로 내 피가 아니란다. 이것 봐, 토하지 않았어. 내 입가는 깨끗하잖니?”

“그래도……”

“츠사카.”

마치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수수께끼처럼 말과 말이 꼬여진다. 묶었다가도 금세 풀어버리는 변덕스런 뜨개질처럼 음성들이 어긋난다. 분명 한 공간에서 목소리를 뜨고 있는데. 텐쇼인 에이치의 대답은 맞지 않는 답을 매기듯, 아니, 애초에 답이 없는 말을 문제랍시고 내뱉고, 스오우 츠카사는 답을 쫓고만 있다. “괜찮아, 네가 내 곁에 있잖니?”, 텐쇼인 에이치가 말하고, “저는……” 스오우 츠카사가 말한다.

달이 밝다, 고 그가 말했다. 검은 하늘에 흰자위만이 걸려있다. 밤에도 늘 눈이 있지? 이 하늘 전체가 도깨비고, 나는 언제나 흰자위밖에 없는 도깨비에게 감시를 당하고…….

“첫날부터 이렇게 격한 환영을 받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도깨비란 말야, 밤중에 몰래 살금살금 걸어서 날 찾아와. 매일, 매일 밤이 그렇지.”

이번 문제는 조금 쉬웠다.

“자객을 말씀하시는 게 맞으시죠? 그렇다면 범인을!”

스오우 츠카사는 대답을 쉬이 내뱉었으나,

“글세, 범인은 누굴까. 노리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말이야.”

그의 말은 스무고개처럼 이어진다.

“나는 황자니까.”

처음부터 문제랄 것도 없었다. 문제도 정답이랄 것도 없었지만, 구태여 그럴듯하게 해석을 달아보자면, 그가 지닌 이름의 무게가 된다.

“나 하나 죽으면 이득 볼 사람이 이 성에는 무척이나 많거든. 오늘 만난 츠키나가도……”

“제가,”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말에 담긴 상냥함의 농도가 짙었다. 약간의 힘을 준 손 하나만으로도 짓눌러 억누르고, 짓뭉갤 수 있을 만큼 부드럽고 연한 목줄기에서 흘러나오는 그 음성과,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말하는 눈동자가

“걱정하지 마세요. 힘이 되어 드릴 테니, 부디 제게 기대어주세요.”

강인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흔들림도 없이 제게로 꽂혀 들어오는 직선의 시선을 느끼며 텐쇼인 에이치는,

“네가?”

하고 물었고,

“저도 어엿한 사내인걸요. 할 수 있어요.”

그가 답하고 있었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눈동자가 마치 수도로 떠남을 결의 짓던 날, 제 손에 쥐여준 금앵초와도 닮아있었다.

달빛을 엷게 품은 눈동자는 흐린 안개가 끼어있어야 당연한데, 망막 위로 말갛게 드리워진 하얀 달빛은 네 눈동자에 닿을 때 왜 그리 맥없이 녹아버리는지, 밤 아래서 네가 내뿜는 빛이 너무도 밝아서, 선명하고, 뚜렷해서. 칠흑 같은 도깨비의 뱃속에서 어둠에도지지 않고. 밤이 깊어서 방은 몹시나 어둡고 어두운데 그 속에서도 창문을 뚫고 들어온 달빛 몇 가닥이 네 주위를 감싸는 바람에 차마 어둠이 네게 앉지 못해서, 너만은, 너만은 빛이 나고 있어서. 달 아래선 네가 빛나서.

달과 함께 빛난다.

“그래. 그래 주겠니? 나의 츠카사?”

텐쇼인 에이치가 내민 손이 그의 눈가를 조심스레 맴돌고 있었다. 슬깃 눈썹을 어루만지는가 싶던 창백하고 파리한 손가락이 그대로 흘러내려 뺨을 품는다. 손가락이 매끄러운 뺨 위에 제 지문을 붙여낸다. 흔적을 긋는다. 손이 가진 선은 날카로웠지만, 부드러운 어루만짐은 뺨에 상처 하나 새기는 법 없이 부드럽게 흐르고,

“네.”

스오우 츠카사는 고개를 끄덕여 충성을 맹세한다.

“밤이 깊었구나. 얼른 자야지?”

하얀 가지와 같은 손가락으로 다시 한 번 영근 뺨을 가지런히 쓸어내리며 그는 웃었다.

“네……”

작은 끄덕임으로 응수한 츠카사는 그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방문으로 향하던 몸을 멈추게 한 건,

“츠카사?”

하고 부르는 그의 목소리였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단단했던 음절의 끝이 허물어졌다. 조곤하다기보다는 겁을 먹었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미약한 속삭임이었다.

“형님의 부탁이라면 그 무엇이든지.”

자꾸만 맥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약한 음성을 신중히 받아내며 츠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럼. 내 곁에서 같이 자 줄래?”

텐쇼인 에이치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