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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스타

[레오츠카]이종교배 異種交配

엘리스.aliceeli 2016. 11. 7. 16:59

* 츠카른 전력 60분, 주제 벚꽃으로 달렸습니다.



[레오츠카]    이종교배 異種交配





눈이 내렸고, 벚꽃 위로 자리매김을 했다. 피기도 전에 벚꽃은 서서히 얼음이 되거나 눈과의 교접 속에서 새로운 종을 만들어내게 될지도 모른다. 연분홍 벚꽃 위로 하얗게 덩어리지며 피어나는 눈꽃들을 보면서 스오우 츠카사는 책상에 팔을 올리고 그 팔에 얼굴을 파묻고 소매에 스며져있던 나프탈렌의 냄새를 느낀다. 건조하게 메마른, 그 정갈한 향취 속에서 어쩐지 ‘외롭다’고 느낀다. 퍼석하게 메말라 체취 따윈 조금도 깃들지 않은 먹먹한 냄새가 잔향조차 남겨주지 않은 채 깔끔하게 사라져가고 있었다.

소매는 깨끗하다. 오염된 곳 하나 없이 반질반질 윤이 나도록 잘 닦아놓은 장석만큼이나 햇볕에 닿을 때면 쨍하니 빛날 정도로 하옇다. 바로 이틀 전에 그가 찍어놓았던 매직 자국도, 벽 위로 색색이 무지개처럼 빛날 오선을 펼치기 위해 휘두른 손에 긁혀버린 탓에 그려졌던 팔꿈치의 무지개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제 팔뚝이 그가 그린 무지개의 일부분이었다.

난감한 얼굴로 팔 뒤꿈치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리는 저를 향해 그는 밝게 웃고, 소매를 붙들고, 음표를 그려주었다. 반쪽짜리 온음. half note.

이분 음표?

응, 반쪽이야.

왜 반쪽이죠?

온음을 두 개로 나눈 거니까 반쪽이지.

그 정도의 상식이라면 스오우 츠카사도 알고 있다. 그가 물은 건 어째서 온음이 아니라 하필이면 하나짜리 외톨이 2분 음표를 그려놓은 것이냐는 물음이었다. 이래서야 제대로 된 마디도 멜로디도 만들어 낼 턱이 없다. 허공을 부유하는 부평초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저 홀로 외로이,

혼자선 안 돼, 반드시 짝이 있어야 해. 그래야 완벽한 note니까.

그럼 나머지 반은 어디에 있나요? 완성해주시겠어요?

묻자, 그는 그저 웃는다. 바닥에 엎드려 제 손으로 펼쳐놓은 무지개 위로 단단한 음들을 박아 넣는다. 깔깔한 감촉의 나뭇바닥에 그려진 무지개와 촘촘히 박혀 들어가는 검은 점의 음표들은 어딘지 모르게 기괴해 스오우 츠카사는 제 팔꿈치에 새겨진 음표를 손가락으로 문질러본다. 단단했던 가장자리가 거스러미가 피듯이 부옇게 번져갔다. 음표들은 거의 지문까지도 번져있다. 짓무른 음표들이 잡아먹을 기세로 손가락을 검게 물들인다.

꺼끌꺼끌한 나무 바닥에 쓸린 그의 손바닥이 새빨갛게 부르터있다. 스오우 츠카사는 그 손바닥을 바라보다, 손바닥 주름 사이로 파고들기 시작한 오선의 흔적과 번져나간 음들을 바라보며 더렵혀진 바닥을 지우는데 또 얼만큼의 시간이 걸릴까, 생각한다.

무지개 위에 핀 검은 꽃들을 모조리 박멸시키는 데까지는 채 세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세제를 붓고 바닥을 문지르다보면 팔꿈치는 물론이고 허리까지고 뻐근하고 무릎이 쓰려온다. 체중을 받친 탓에 무릎이 쓰리는 일이야 당연하다. 팔뚝이 훤히 내보일 정도로 소매를 걷고 바닥을 문지르고 있다 보면 추위에 몸이 움츠려 들었다. 봄기운이 간간히 묻어나오는 겨울바람은 여즉 쌀쌀했다.

이런 날은 늦겨울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까, 아니면 초봄이라고 이름 붙이는 게 더 옳은 것일까. 시기상으론 3월이니 봄이라고 말하는 편이 옳다, 그러나 예년과 다르게 추위가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고 있었다. 연푸른 새순이 돋아났다 싶다가도 때 아닌 겨울 칼바람에 모가지가 숭덩숭덩 베이기라도 한 양 다음 날이면 추위에 얼어붙어 죽어있었다. 이따금 발에 밟히는 무른 감촉을 느끼다보면 이것은 새순이었겠지, 생각했다.

스오우 츠카사는 소름이 잔뜩 오른 팔뚝을 천천히 손바닥으로 문지르다, 접어 올렸던 소맷단을 한단 풀어 내렸다. 그럼에도 추위가 여즉했다. 손주먹 하나만 빼꼼 나갈 정도로 열어둔 창문틈새로도 겨울바람은 사납게 파고든다. 바람에 악보가 펄럭인다. 아직 오른쪽 하단에 제대로 페이지수를 기입해두지 않아 저대로 섞인다면 앞도 뒤도 알아볼 수 없게 된다. 그래선 기껏 들인 수고도 쓸모없어진다. 서둘러 낙장으로 흩어지는 음표들을 주워 품에 가둔다. 바닥엔 아직도 흘러넘친 마디 투성이다.

엉망진창이다. 이미 반절은 지워버린 바닥의 악보들의 기억을 세심히 끈질기게 더듬어 페이짓수를 맞추어본다.

엉망진창이네, 생각한다.




엇갈리는 우연처럼 순서가 뒤죽박죽 된 단조들이 겹겹이 물려있는 악보들은 가지런히 접어 공책 사이에 넣어두었다. 이르다면 내일 아침, 늦다면 사흘 안으론 츠키나가 레오의 손으로 전달될 예정이 악보들이다.

츠키나가 레오는 언제나 아무 곳에나 제 음들을 질질 흘리고 다니고 결국엔 그를 모두 떠안아 감싸는 건 스오우 츠카사의 몫이다. 즉흥적인 낙서와 가까운 그의 휘갈김을 두고서 스오우 츠카사는 가방 한쪽에 단정히 채워 넣은 오선지들을 꺼냈다. 그가 떠난 자리에 이제는 제가 앉아 조금씩 악보와 바닥을 번갈아 가면서 텅 빈 전신주 같은 오선지 위로 쓸쓸하지 말라며 앉아있는 참새처럼 음표들을 집어넣어주었다. 이따금 꼬리를 길게 늘어트리는 때 아닌 공작 같은 음표들을 연달아 수놓으면서, 이것이 여섯 개였나 일곱 개였나, 손톱으로 세어 눌러가면서 그가 휘갈기고 난 음들을 더듬어보곤 했다.

휘갈김에 가까운 날카롭게 선 그의 흥얼거림들을 스오우 츠카사는 단정하고 가지런하게 오선지 위에 자리 잡도록 달랜다.

단단히 맞물려있던 입술 사이가 허물어지면 줄곧 어둠에 감싸져 있던 공간이 속을 내비친다. 언제부턴가 작게 흥얼거리며 스오우 츠카사는 손을 움직여내고 있다. 때는 봄이라도 바람은 아직 겨울, 찬바람이 매끄러운 이마를 엿보기 위해 제멋대로 앞머리를 들추곤 사라져간다. 추위에 콧잔등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악보는 고스란히 지금 제 가방 안에 들어있다. 그들은 벌써 이틀째 줄곧 동면상태다. 이 문장은 우습게도 요 이틀간 츠키나가 레오를 마주하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운동장으로부터 흘러들어온 복작한 소음들이 창문을 두드린다. 스오우 츠카사는 고개를 내밀어 창밖을 흘낏 바라본다. 그늘이 삽시간에 운동장 이편으로부터 저편으로 제 몸을 옮겨낸다. 찬바람에 흔들리는 가지가 몸을 비틀거리는 바람에 그림자마저도 휘청거린다. 그 어디에도 그가 찾는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이토록 무수히 지면을 물들이고 엉망진창으로 오염시키는 그림자들 속에 그의 그림자가 한 점도 깃들어있지 않다는 말은 우습기도 했다. 들개가 세상 지천 어지러운 줄 모르고 이리저리 쏘다니듯이 교내를 휩쓸고 다닐 그의 그림자도 여기저기에 개의 분비물처럼 묻어있어야 했다. 해질녘이면 노을과 응달을 연달아 겹겹이 제 털에 씌우며 들판을 쏘다니는 들개처럼 그도 그림자를 이곳저곳에 흘리고 다녀야 했다. 우습게도 요 이틀간 전혀 그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게 문제였지만,

스오우 츠카사는 다시 한 번 팔에 고개를 묻고 나프탈렌의 향취를 맡는다. 끝물에 이르러 미약하게 탈취제의 온화한 향이 풍겨 나왔다. 그 잔향은 꽃향이었다.

창밖에선 연신 눈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때 아닌 3월에 내리는 눈이 개화기의 꽃들에게 덮쳐들고 있었다. 알이 제법 성하고 강한 눈송이들이 꽃 위로 자꾸만 제멋대로 제 몸을 비비고 입 맞추려 들고 있었다. 안쓰럽게도, 벚꽃 잎은 제대로 입술 한 번 벌려내지 못하고 얼어 죽을 예정이었다. 연분홍 꽃잎 위로 또 눈이 내려앉았다. 그 속에 자리 잡을 노랗거나 물이 덜든 연녹빛 수술위로, 꽃의 교태 위로 차디찬 눈만이 내려앉는다.

눈들은 자꾸만 꽃 위로 제 몸을 내던진다. 바닥에 닿으면 저들끼리 엉기지 못하고 힘없이 풀어지면서도 자꾸만 눈 위에선 굳건히 제 몸을 불리며 꽃을 집어 삼키고만 있었다. 눈은 거듭 하늘거리는 몸을 자꾸만 꽃 위로 겹치려고만 하고, 그 차가운 포옹에 꽃들은 얼어 죽거나, 하릴없이 죽어버리거나, 흐드러지게 주저앉거나, 혹은 새로운 종이 되는 수밖엔 없을 것이 분명하다.

제 꽃을 피워내기도 전에 죽어버리는 걸까, 아니면 새롭게 태어난다고 말해줘야하는 걸까. 눈과 벚꽃 사이의 교미로 태어난 그 꽃은 꽃일까, 얼음일까.

눈을 잠시 감았다 떴을 뿐인데 그새 꽃 하나가 새롭게 돋아올라 있었다. 순백의 눈 위로 한 점의 해질녘이 걸려있다. 해가 지기엔 이른 시각이었다. 주홍빛 꽃이 돋아난 자리를 천천히 눈여겨 담던 스오우 츠카사는 제 가방에서 여태껏 잠들어있던 악보를 깨웠다. 손에 악보를 움켜쥐고 교실 문밖으로 서서히 그러나 성급하게 걸어 나간다. 츠키나가 레오가 눈이 내리는 벚꽃나무 아래에 앉아있었다.




목줄이 제대로 채워지지 않은 들개처럼 교정 이곳저곳을 제 영역마냥 넘나드는 그였기에 그새를 못 참고 또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건 아닌가하는 우려와 반대로 눈 위에 핀 그는 그 자리에 뿌리라도 내린 양 고요히 머물러 있었다. 스오우 츠카사는 분주히 걸음을 옮기는 새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갈하게 다듬어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찬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지나간 통에 매끈한 이마가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선하게 드러났다. 뺨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추위 탓으로.

고작 반나절 퍼부어진 눈들은 성급하게 녹아내리기 십상이다. 녹다가도 찬바람에 거듭 얼어붙어 바닥은 흐물흐물해진 빙판 같았다. 발을 옮길 때마다 미처 녹지 못한 눈들이 찌걱거리는 발소리를 만들어주었다. 시끄럽게 질척이는 눈들을 질질 끌며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도 눈 위에 피어오른 츠키나가 레오는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의 곁에 다가서기까지 고작 다섯 걸음 정도 남았을까, 돌연 눈덩이 하나가 그의 뺨 위로 얹혔다가 속절없이 허물어지며 지면으로 추락했다. 그 차가운 자살너머로 눈이 남기고 간 한기에 뺨이 베일 듯 시려왔다. 스오우 츠카사가 몸을 움츠리자,

방심했지?

장난기가 잔뜩 서린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 어린애에요?

추위에도 판판했던 미간이 그가 던진 작은 눈덩이 하나로 인해 보기 싫게 구겨져있다. 미간과 미간 사이에 작은 주름이 물결친다. 이마가 해질녘의 물결치는 강변처럼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눈썹과 눈썹 사이에 일어나는 작은 파문,

아! 정말!

또 하나의 눈덩이가 그 위로 빠져든다. 제법 얕게 뭉친 눈덩이들은 힘이 없어 퍼석하게 빻이는 소리만을 들려주며 또 다시 아래로 추락한다.

분하면 스오도 하나 던지던가!

제가 못할 줄 아시나 본데요! 할 수 있거든요?!

그의 도발에 스오우 츠카사는 눈덩이를 뭉치기 위해 고개를 숙였고, 손끝에 닿는 눈의 축축함에 작게 미간을 찌푸렸고, 되직한 반죽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려는 눈을 힘주어 움켜쥐려 했는데, 몸이 휘청거렸다. 돌연 눈밭으로 나뒹굴고 말았다. 눈앞이 번쩍였다. 삽시간에 주어진 암전. 무언가에 눌린 가슴팍이 답답했다. 가슴팍뿐만 아니라 어깨가, 허리가, 엉덩이 뒷골마저도 얼얼하고 답답했다. 뒤로는 축축한 눈들이 옷새로 파고들어온 탓에 차갑고 시리고, 그 얕은 한기들은 제 가냘픈 체온에 닿는 순간 속절없이 녹아버려 축축해져오는데 억눌린 가슴과 어깨만큼은 따뜻했다. 눈앞은 여전히 암전. 눈꺼풀을 열고 닫아보아도 눈앞은 겨울밤이다.

답답해요.

그가 제 위에 올라탄 탓이다. 스오우 츠카사는 억눌린 몸을 최대한 비틀어 팔을 들어 허공을 향해 손짓한다. 손가락 끝에 그의 팔꿈치가 걸렸다. 손바닥이 금세 축축해져왔다. 그가 제법 오랜 시간 눈 위에 앉아있던 탓이었다. 힘을 주어 축축한 천 가지와 그 아래에 딱딱하게 자리 잡은 그의 도드라진 관절을 잡아 당겨보지만, 웬만한 아귀힘에도 그는 요동치지 않았다.

무겁다니까요!

소리치는 입 안으로 차가운 눈송이들이 떨어진다. 츠키나가 레오는 다시금 눈을 주어다 제 아래에 깔린 그의 얼굴 위로 약하게 흘려보낸다.

하얗게 응결되있던 눈송이들이 투명하게 녹아내린다. 뺨 위로 선명한 물줄기를 남기며 눈들이 츠카사의 위에서 녹아간다. 흘러내렸다. 몇 번이고, 몇 줄기고 그렇게 흘러간다.

옷깃 아래로 녹은 눈들이 스며든 탓에 스오우 츠카사는 작게 몸을 떨었다. 소름이 돋은 뺨 위로 자그맣게 돋은 솜털이 보였다.

추워?

말이라고! 읏,

그의 차가운 손이 츠카사의 목을 움켜쥔다. 옷깃 속으로 파고들 듯 거칠게 파고들어온 손가락들이 쇄골을 거칠게 긁고 지나가나 싶었는데 목을 움켜쥔다. 손이 차갑다.

츠카사.

그의 손아귀에 눈이 물린 채로 스오우 츠카사는 눈을 깜빡였다. 흐릿한 어둠속에서 보기 위해 눈을 깜빡인다. 입김, 입김, 그리고 입김이 뺨 위로 내려앉는 소리를 보기 위해 애를 쓴다.

츠카사.

그가 다시 한 번 이름을 불러온다. 그의 목소리가 멋대로 뺨을 할퀸다. 목소리가 사라진 자리엔 그의 입김이 다시 내려앉고, 그때마다 맞물리는 찬바람에 뺨 위로 자꾸만 소름이 돋아 오르고, 그가 이름을 부를 때마다 목소리가 물감처럼 묻는다. 붉은 물이 들기 시작한 뺨으로 스오우 츠카사는 숨만 내쉬고 있다. 뺨이 붉은 건 추위 탓인지도 모른다. 그 추위에 물든 뺨으로 스오우 츠카사는 그의 손아래서 눈을 깜빡이고 있다.

그가 이름을 부를 때마다 바람이 불어 스오우 츠카사는 몸을 떨었고, 그때마다 츠키나가 레오는 목을 움켜쥔 손을 고치며 츠카사, 하고 부른다. 그의 사납고 굵은 잇새에 낀 츠카사의 목이 꿈틀, 꿈틀 거린다. 맞댄 살결 너머로 쉴 새 없이 요동치는 심장박동 소리를 느낀다.

타닥, 타닥, 타닥, 제 손가락들에 입맞춰오는 그의 박동을 느끼며 츠키나가 레오는 웃었고, 때마침 불어온 찬바람에 앞머리가 휘청거리며 들춰지는 바람에 반듯하고 깨끗한 이마를 드러내 보인다. 스오우 츠카사는 손을 들어 그 이마를 제 지문으로 조심스레 문지르고 더듬었다. 그를 읽듯이 노력한다.

츠키나가 레오는 그런 스오우 츠카사의 눈을 가린 제 손바닥 위로 조심스럽고 조심스럽게 입술을 눌렀다. 눈동자 위로 숨소리가 들렸다. 숨소리가 들린다. 눈동자 위로 스며들던 숨줄기가 조심스럽게 입술 사이로 파고든다. 스오우 츠카사는 그저 깜빡이던 눈꺼풀을 힘주어 닫으며 조심스럽게 그의 숨을 느낀다. 입술 새로 퍼지는 그의 날숨이 제 속에 천천히 들숨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돌연 눈앞이 환해졌다. 갑작스레 쏟아지는 빛살에 츠카사는 눈을 찌푸렸다가 다시금 천천히 망막의 초점을 잡아간다. 눈앞으로 그의 반듯한 이마가 제일 먼저 엿보였다.




제 곁에서 떨어져나간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제게 건네어진 악보를 살펴보고만 있다. 츠카사는 축축해진 옷깃을 여며보았지만, 이미 젖어버린 통에 추위를 가속시킬 뿐이라는 판단아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그의 곁에 멀뚱하니 서있다.

어딘가 제가 잘못 사보한 부분이라도 있는 것일까, 종이뭉치를 움켜쥔 그의 미간이 얄팍하게 위아래로 씰룩거린다.

흐음,

하는 묵직한 콧소리마저 뱉어낸다.

저……,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물어오는 그를 향해 츠키나가 레오는,

미완성이라서.

말한다.

그럴 리가요, 그때 바닥에 제멋대로 하신 낙서 토씨, 아니, 음 하나 안 빼먹고 모조리 옮겨 적었습니다.

정말?

네.

단호한 대답에 그는 시리고 축축한 눈 위에 종이가 젖는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지 아랑곳없이 너저분하게 펼쳐놓는다. 애간장이 타는 건 오직 스오우 츠카사 한 사람 뿐이다.

종이가 젖잖아요!

순서가 뒤죽박죽이라 처음엔 잘 몰랐는데 말이야,

윽,

분명 한차례 교실 바닥을 휩쓸고 간 바람 탓에 악보들이 뒤죽박죽으로 섞이긴 했었다. 그래도 찬찬히 기억을 역순으로 되짚어가면서 순번을 제대로 맞춰두었다고 나름 자신했던 스오우 츠카사였기에 입술을 꾹 깨문 채 답응하지 않았다. 뭣보다 사보한 제 기억보다야 작자인 그의 기억이 맞을 확률이 월등이 높았기에, 저는 그저 그려진 음절들을 종이에 모사한 이에 불과했다.

한 음이 빠졌어.

그가 말한다.

빠진 음을 기억하신다니 잘 되었네요, 그럼 이제 리더가 채우시면 되겠어요.

아무래도 빈정은 상하기 마련으로 약간의 볼멘소리를 섞어 대답하며 스오우 츠카사는 팔짱을 끼며 그에게 사납게 대꾸했다. 고작 한 음이다. 한 음으로 제가 애써 공들여 사보한 것에 대한 수고가 가는 모래로 만든 성처럼 연약하게 무너져 내렸다.

전 교실로 돌아갈게요. 누구누구와 달리 수업에 들어가봐야 하니까요.

제법 얄궂게 쏘아붙이며 몸을 돌리는데 단단하게 굳어있던 몸이 흔들렸다. 그가 소매를 붙잡아왔다.

또 뭐에요!

네게 있잖아.

하?

이번엔 소매가 아닌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어온다. 그 악력에 스오우 츠카사는 저도 모르게 악 소리 나도록 비명을 지를 뻔 했지만, 입술을 힘주어 깨물었다. 억눌린 신음 탓에 목이 간질간질했다.

네가 없으면 이곡은 미완성이야. 너한테 줬어, 내 반음.

무슨,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가 손목을 잡아당긴다. 뿌리치려했다 되려 그 반동으로 그의 품에 안겨 든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죽 끓듯 변덕을 부리는 이 사람의 기분에 맞춰줄 수 없다는 생각에 스오우 츠카사는 몸을 비틀다 문득,

설마? 소매에 묻었던 거 말하시는 거예요?

하고 묻는다.

묻은 게 아니야.

아니, 그러니까 그 이분음표요.

너한테 준 거였어.

알아들을 소리를 해주시겠어요, 리더?

내 노래의 반을 너한테 줬잖아.

팔꿈치를 스치고 지나간 그 콩알만 한 음표는 실로 자그마해서, 새끼손가락 지문만큼 작은 크기라서, 그저 한 점의 얼룩에 지나지 않는 그 음표는 얼룩밖에 되지 않아서,

네, 그 이분음표 말씀이시죠.

이분음표는 반쪽자리 음이라서, 고작 한방울 흘려버린 잉크보다 못한 점크기, 한 음표 하나로는 마디도 멜로디도 뭣 하나 되지 않아서, 그저 건반 하나 정도의 소리밖에 되지 않아서, 너무 보잘것없이 실로 작은 부스러기와도 같아서, 겨울 찬바람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고 짓밟히고 죽어버리는 소리와도 같아서,

너한테 줬어. 중요하다고 말했잖아.

반쪽밖에 되지 않는 그 음 하나가 뭣 그리 대단하다고, 혼자선 맥도 못 추스르고 죽어버리는 그깟 이분음표 하나가 뭐라고,

이분음표잖아요.

반쪽이잖아.

한 음이잖아요.

남은 음도 혼자선 완벽하게 소리를 낼 수 없다니까?

이 사람은 그 이분음표가 무어라고 남의 팔꿈치에 심술 맞게 그려넣고선, 그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이 엄동설한에 사람을 붙들고 알 수 없는 소리를 해대는지,

리더의 생각하는 방식 말이죠, 남들이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말해줄 생각은 없어요?

너라면 알아 듣잖아.

스오우 츠카사는 이 어처구니없는 사람의 사고방식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제 소맷단에 옮겨놓았던 음표를 떠올린다. 분명 그때 저는 그가 그린 오선의 무지개의 일부였고, 그가 던지고 간 음이었고, 그가 만들던 곡의 일부였고,

네가 없으면 이 곡은 미완이야. 앞으로도.

스오우 츠카사는 한숨에 가까운 숨을 내뱉고, 그의 미간 사이에 단단히 깃든 주름을 펴내기 위해 손가락을 문지른다. 차가운 손가락에 닿은 이마도 무척이나 차가웠지만, 어딘지 모르게 아릴 듯이 뜨거웠다.

우선은 추우니까 안으로 들어가지 않겠어요? 이대로는 미완이고 완성이고 전에 동사할 거 같으니까요.

츠키나가 레오는 미간을 다시 찌푸린 채 스오우 츠카사의 손목을 잡는다. 걸음을 옮겨낸다. 차가운 손가락이 닿은 손목이 시렵고 아렸다. 손가락 아래로 다시 한 번 타닥이는 박동 소리가 살갗 위로 스멀스멀 기어올라 츠키나가 레오의 손가락에 들러붙는다.

두 사람의 뒷모습 너머로 또 다시 눈이 내린다. 예기치 않은 봄의 폭설은 다음날까지도 이어졌다. 한차례 함박눈이 거세게 퍼붓고 난 뒤에야 하늘은 이윽고 잠잠해졌다. 그 봄눈은 자꾸만 거듭 벚꽃 위로 내려앉고, 연신 부드러운 꽃송이를 껴안아 청혼해보지만, 여문 꽃들은 부드러운 마음을 내어주지 않아 자꾸만 얼어붙고 딱딱해졌다. 그 사이로, 반쪽자리 눈과 반쪽자리 벚꽃이 만났다. 찰나의 우연과도 가까웠다. 눈이 내리던 그 순간, 그 추위 사이로 얼은 꽃 하나가 봉오리를 펼쳤다.

눈과 벚꽃 사이 기막힌 이종교배, 수술이 하얗게 얼어붙은 벚꽃 하나가 봉오리를 펼치며 한껏 눈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제 벚꽃은 새하얀 눈과 한 몸이 된다. 차가운 달빛 아래서도 환하게 빛이 날 터였다.

함박눈 내리듯 꽃송이가 움트는 소리가 소복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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