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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연인
츠키나가 레오 X 스오우 츠카사,
* 츠카른 전력 60분, 주제 첫데이트으로 달렸습니다. 대왕지각.
어딜봐도 데이트같지도 않고 데이트가 없는 것 같지만... 데이트란 말을 생각하며 써보았습니다.
*
방안에 고여 있던 침묵의 출렁거림을 생각한다. 그의 머리카락만을 더듬고 있던 잔상과도 같은 작은 섬광체들의 지장을 생각한다. 그림자와 빛이 닿지 못한 그늘과 미약한 화면의 잔상들이 한데 뭉쳐서 그를 더듬고 있던 그 풍경을 생각한다.
문득,
그 집요하고도 끈질긴 손길 속에 제 몸을 맡긴 채 편안한 낯으로 세상의 모든 잠이란 잠은 죄 제 몸으로 불러와 붙여낸 듯 눈을 감고 깨지 않던 그, 자신이 가까이 다가가도, 옆자리에 앉기 위해 몸을 비척이며 그 주변의 공기를 들쑤셔도, 제 위를 내어주기 위해 의자가 휘청거리는 다리를 질질 끌어대던 사나운 소리에도, 츠키나가 레오는 눈 한번 깜빡이는 법도 없이 잠을 자고 있었다.
스오우 츠카사는 그 옆에 앉아 그가 보지 못한 영화를 보았다. 서로 지나칠 정도로 말이 없는 세계 속에서 진행되는 이야기, 몸이 투명한 고래의 뱃가죽 속에서 바다를 내다본다면 펼쳐질 심해와도 같이 조용한 색채를 가진 밤의 이야기로, 가로등불과 달빛, 제 온몸으로 빛을 반사하며 은은한 발광을 보이는 눈들이 전부인 세계의 이야기로 한 쌍의 인간이 등장할 뿐인 영화였다.
두 사람은 어두운 밤 눈길 위를 걷고 있었다. 한 사람이 목에 감고 있던 머플러를 풀러 건네주자, 그이는 물끄러미 머플러를 보다 제 장갑을 벗어 그 사람의 손에 씌어주었다. 둘의 체온을 나누는 방식은 그러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체온을 묻힌 머플러와 장갑을 교환한 채 묵묵히 눈 위를 걷었다. 걷다가 지치면 눈 위에 눕기도 했다. 한차례 그렇게 휴식을 가진 뒤에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한참을 서로 응시하다가 손을 잡고, 눈과 눈을 마주치고, 숨과 숨 사이를 좁혀 입술과 입술을 맞대며 침을 나누었다. 침 속에 섞여 들어갔을 얄팍한 숨들이 비눗방울처럼 부풀어 오르다가도 끈끈하고 투명한 궤적을 이루며 턱밑으로 늘어졌다.
그리고 입김.
그이의 입으로부턴 입김이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데 어두운 밤하늘 아래 밝은 달빛 아래에서지지 않고 흩뿌려진 모든 입김은 사물을 들쑤시고 퇴색시키고 빛바래고 자꾸만 초점을 흐트러트리는데, 한 사람은 입김이 없다. 뚜렷한 어둠과 또렷한 달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그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모든 소리에 음소거가 걸린 세계 속에서 두 사람은 이 길의 시작에서부터 저 끝까지 걸을 뿐인 영화였다. 소음이 거세당한 그 세계 속에선 숨소리와 이따금 퍼석거리며 제 흔적을 나타내는 눈의 소리, 하염없이 내리는 달빛의 숨소리와 궤적이 그리는 소리들이 가늘고 가는 실선처럼 늘어졌고, 그리고 어둠의 지긋한 잇소리가 전부인 세계로 조용하고 침착하게 침묵 속으로 가라앉을 뿐인 폐선과도 같은 그 세계 속에서도 유일하게 떠오르는 말이 하나 있었다. 올곧고 뚜렷하게 제 귀로 다가온 그 말은, 마치 어딘가 단단한 글자로 허물어짐 없이 새겨지기라도 한 듯 눈앞에 또렷하게 떠오르는 듯 제 귓전으로 파고들던 발화(發話)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국의 말로,
길의 종말에 선 그이가 마주 선 그 사람의 손을 잡으며 입술을 벌린다. 한껏 주름을 펴내다가도 겁에 웅크린 아이가 옹알거릴 때처럼 입술을 움츠렸다가도, 용기를 내 제 속의 동굴을 내보인다. 줄곧 지켜왔을 깊고 깊은 제 동굴 속에서 고이고이 묵혀왔을 소리를 드디어 허공으로 풀어헤친다. 그 마음을 지금 스오우 츠카사는 엿듣고 있었다.
스오우 츠카사는 눈꺼풀을 내리깐 채로 음성을 듣는다. 그때 우연히, 실로 우연찮게, 제 옆에 앉아 팔을 베개 삼아 잠든 그의 낯이 보였다. 침묵 속의 응시가 이어졌다.
화면도 같았다. 지긋하고 또 지긋한 응시. 마치 제 이로 물어뜯은 날짐승의 숨이 사그라들기를 기다리는 맹수의 허기의 시간처럼 지긋하고 집요한 눈길로 그 사람은 그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람은 그이를 잡아먹기를 그만둔 채 등을 돌렸다. 그이의 그림자가 출렁거리며 츠키나가 레오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을 때, 그이의 그림자가 스오우 츠카사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듯이 훑고 사라졌다. 그의 뺨을 훑던 그 검고 어두운 얼룩이 츠키나가 레오이 눈꺼풀 위에 내려앉았다.
그림자의 부스러기를 털어주기 위해 스오우 츠카사는 손을 뻗었고, 눈꺼풀 위에 실로 가만히 또 조심히, 미약한 열기를 가질 뿐인 지문 끝에서조차 녹아버리는 살얼음의 결정을 매만질 때처럼 조심스레 그저 눈꺼풀 위에 손가락을 올려둔다. 올려둬 본다. 아니, 오히려 손가락 아래로 눈꺼풀이 놓였다는 말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새끼손톱에서 잘려나간 살점처럼 자그마한 그을음이 그의 손가락에 머무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그의 뺨 위로, 스오우 츠카사의 손끝이 그을음을 따라 그이의 뺨 위로 올라가면 콧날선으로, 그 아래 두 개의 선을 지닌 가지런한 인중으로, 곱게 다문 탓에 매끈한 입술-얄팍한 새김 선들이 잘게 자리를 잡은 연분홍 살점 위로도 얹혀지고 있었다. 작은 흑점은 어느샌가 몸을 분열해 그이의 얼굴 여기저기에 저들의 몸을 누이고 구덩을 만들었다. 창백한 뺨 위로 연달아 줄을 지어 흘러가는 그늘들을 바라본다. 스크린 위로 글자들이 줄지어 차례차례 아래로부터 위로 역류하고 있던 까닭이었다.
마지막. 영화의 끝을 알리는 진정한 암전의 시간이 주어져 스오우 츠카사는 옆자리에 잠든 그를 현실로 불러일으키기 위해 손을 뻗었고, 그 순간 또 하나의 여지가 화면 위로 떠올랐다.
폭설이 모든 세계를 제 살점으로 전복시킨 그 세계에서, 말하자면 눈만이 전부인 그 하얀 학살의 세계 속에서 살아남은 두 사람이 있었다. 형태와 빛을 잃지 않은 두 사람, 오직 둘만이 유채인 세상 속에서 그이가 이국의 말을 뱉는다. 한 사람은 웃으며, 이국의 말을 혀끝으로 천천히 내밀어 보였다. 마치 아끼던 사탕을 공들여 오랜 시간 천천히 제 혀 위의 온기로 품어내고 쓰다듬으며 녹여내는 아이처럼, 혀를 내밀며 웃는다. 그 사탕처럼 달디 단 말은,
무슨 말이었을까,
“스오?”
목소리가 가까이서 흘러들어온다. 스오우 츠카사는 소리의 근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잠결이 배어있는 나른한 눈으로 그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일어나셨어요?”
묻는 음성에 대답처럼 지긋한 시선을 보내온다. 입술을 달싹거리는가 싶더니 서서히 손을 뻗어 제멋대로 뺨을 어루만지기 시작한다. 무슨 영문일까, 싶어 그를 부르기 위해 음성을 잇새로 내뱉는데,
“왜 울어?”
물으려고 했던 건 저였을 텐데 오히려 그가 물어왔다.
“네?”
“왜 울고 있는 거야?”
스오우 츠카사는 그제야 느릿느릿 제 뺨을 핥으며 내려가는 미지근한 물줄기를 느꼈다. 눈물은 길게 뻗어내려 가다가도 제 뺨을 문지르는 그이의 손가락 지문을 따라 번져간다. 투명하고 얄팍한 눈물의 막이 그의 지문과 제 볼을 고스란히 적셨다. 따뜻한 온기에 닿을 때마다 미지근한 눈물은 점차 따스하게 달궈졌고, 이윽고 따뜻하게 허공중으로 서서히 증발하고 있었다.
“저도,”
“응?”
“모르겠네요. 왜 눈물이……”
“흐응.”
얼굴을 어루만지던 따스한 온기가 가벼운 콧소리와 함께 떨어져 나갔다. 손가락이 사라진 그 외로운 자리를 제 온기로 채우기라도 하듯 스오우 츠카사는 제 뺨을 어루만졌다. 못내 마르지 못한 물기가 손끝에 묻어났다. 눈물이 닿은 입술에선 짭조름한 소금기가 배어 있어 자꾸만 짠맛이 났다.
“아아…… 영화!?”
돌연 옆에서 그가 제 어깨를 붙들었다. 갑작스런 접촉에 스오우 츠카사는 난색을 표하는 법도 없이 침착하게 그이의 손을 제 어깨에서 떼어내며 단정한 목소리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끝났습니다만.” 자신의 목소리에 그는 시종일관 볼멘소리를 내뱉는 어린아이처럼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거리는 음성-미처 말이 되지 못하는 그 말들만을 웅얼거리며 씹고 있다. 스오우 츠카사, 그는 대화가 되지 못할 그 말들을 귀 기울여 들으며 고스란히 속에 담아 넣고 있었다.
왜, 였을까.
울음을 터트릴만한 일도, 눈물을 흘릴 만큼 슬픈 일도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눈물을 흘려버린 까닭은.
AV실을 빠져나올 즈음 창문 너머로 바라본 하늘엔 어느샌가 해가 저물어 짙은 석양이 제 피를 이곳 저곳에 흩뿌리고 있었다. 물속에서 번져가는 염료처럼, 몸이 잘려 반달만큼 작아진 석양으로부터 흘러나온 붉은 빛이 하늘에 퍼지고 있었다. 제 귀가를 기다리다 지친 운전기사의 부재중 통화가 연달아 찍힌 휴대폰을 보며 스오우 츠카사가 망설이는 새 츠키나가 레오가 저를 재치고 앞서 나가고 있었다. 그는 발광하는 휴대폰 액정을 엄지손가락을 톡톡 두드리다 이내 그 뒤를 쫓았다.
전철을 타기 위해 역으로 향하던 길에는 작은 공원이 하나 있었다. 그는 잠시 벤치에서 쉬어갈 것을 권유했다. 학교 정문을 빠져나올 때 제 앞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던 땅거미들이 어느샌가 발은 물론이고 몸까지 기어올라 있었다. 그의 몸까지도 짙은 그늘이 도색되어 있었다.
벤치에서 잠시 쉬어가자기에 무슨 용무라도 있던 게 아닐까 한 제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옆자리에 앉은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말이 없는 두 사람 사이에 발화점마냥 가로등불에 빛이 반짝 튀어 올랐다. 투명한 캡슐 같은 가로등불을 바라보기 위해 스오우 츠카사가 고개를 위로 들었을 때, 츠키나가 레오의 입이 열렸다.
“아이스크림 먹을까?”
“아이스크림이요?”
놀이터에서 시소나 그네를 타던 어린아이들이 학습 당한 귀소본능에 따라 귀가했을 저녁이기에 공원엔 인적이 드물었다. 이 시간까지 아이스크림을 파는 이가 존재할 리 없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스오우 츠카사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단호하고 침착한 그 거절에 권유한 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한참 동안 그는 그답지 않게 말이 없었다.
땅을 기던 땅거미들은 밤을 먹고 자란다. 점점 더 무성해지고 부른 배만큼이나 색이 짙어졌다. 사방이 어두컴컴해지고 고요 속에 잠겼다. 가로등불 아래에 자리 잡은 두 사람의 외형만이 빛을 반사시키며 빛나고 있었다.
그에게 할 말이 있었던 건 아닐까, 스오우 츠카사는 생각했다. 이렇게 아무 말도 없이 늦은 밤이 되길 기다리면서 침묵을 지키려던 게 그의 의도는 아니었으리라, 그는 무릎 위에 가지런히 두었던 양손을 모아 깍지를 끼며 혀로 입술을 축였다.
“저,”
“역시 아이스크림, 먹을까?”
침묵을 쫓기 위해 말을 뱉으려는데 줄곧 정면만을 응시하던 그가 돌연 고개를 돌리더니 물어왔다. 스오우 츠카사는 거절하지 않았다. “네, 좋아요.” 대답을 들은 그가 환하게 웃는다.
그 시각까지 공원에서 오지도 않을 불확실한 고객을 위해 아이스크림을 판매할 이는 없었으므로, 두 사람은 역전에 자리 잡은 프랜차이즈 아이스크림 가게에 향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공원에서 보여줬던 백일몽 같은 묵언에서 깨어난 그는 가게로 향하는 내 쉴 새 없이 말을 걸어왔다. 대화라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운 그 부스러기들을 스오우 츠카사는 경청하듯 고개를 끄덕이거나, 간간이 대답을 내어주었다. 그때마다 그는 만족스런 웃음을 보여주었지만, 못내 두 사람 사이의 말들이 겉돈다는 감각은 지울 수가 없었다.
퇴근길의 점포에는 사람이 적었기에 두 사람은 기다림 없이 아이스크림을 받아들 수 있었다. 제멋대로인 그의 성미에 따라 스오우 츠카사는 맛을 선택할 권리도 빼앗긴 채 묵묵히 제게 내밀어진 딸기맛 아이스크림을 받아들이는 수밖엔 없었다. 이른 봄에 갓 피어난 벚꽃을 닮은 연분홍빛 아이스크림은 우유가 잔뜩 섞인 탓에 혀끝에 닿을 때면 부드럽게 녹아 흘렀다. 스오우 츠카사는 아끼는 사탕을 차마 베어 물지 못하고 앞니로만 야금야금 깨물어 먹는 어린아이처럼 아이스크림을 천천히 그리고 공들여 깨물어 먹었다. “있잖아.”
“?”
역으로 들어서는 계단 옆에 무성한 가로수와 풀을 등진 채 나란히 서 아이스크림을 핥고 있었다. 그가 운을 떼어 스오우 츠카사는 줄곧 아이스크림과 바닥만을 바라보던 눈동자를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움직였다.
“아까 왜 운 거야?”
그가 묻는다.
“모르겠어요.”
그는 대답한다.
“흐응.”
그는 가벼운 콧소리를 허공에 실려 날린다. 그는 다시 발에 짓밟혀 울퉁불퉁한 보도블록을 바라보며 아이스크림을 핥는다. 혀끝이 시리다. 입안이 얼얼했다.
“있잖아요.”
이번엔 그가 묻는다. 츠키나가 레오의 고개가 저를 향하였음을 느끼면서도 스오우 츠카사는 줄곧 보도블록만 제 시야에 가득 채운 채로 입술을 벌린다. “그 영화, 제목이 뭐에요?”
“글쎄. 프랑스어라서 잘 모르겠는데.”
진실일까. 스오우 츠카사는 고개를 아주 약간 흔들어 곁눈질로 그를 훔쳐본다. 그의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이 줄줄 녹아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데도 그는 개의치 않는다.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리는 진한 물줄기가 바닥 위로 투둑거리는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연인?”
아연, 그가 손을 뻗어 제 뺨을 톡 하니 건드렸다. 건드렸다기보단 쓰다듬었다. 그의 지문을 제 뺨 위로 묻혀내듯 지긋한 손짓이었다. 냉기로 얼얼하던 볼이, 손가락이 닿은 그 자리만이 불에 찔리기라도 한 듯 따끔거려 스오우 츠카사가 미간을 좁혀냄과 동시에 그의 손가락이 떨어졌다. 뺨에서 떨어져 나간 손가락엔 하얀 얼룩이 묻어있었다. “아이스크림 묻었어.” 부대끼면 쨍하니 소리가 날 정도로 밝은 하늘에 놓여진 태양처럼 천진한 낯으로 환히 웃는 그가 제 뺨을 닦아낸 손가락을 핥고 있었다. 반대편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이 천천히 죽어가는 소리를 보도블럭 위에 투둑, 투둑, 진한 흔적을 남기며 스며드는 것도 모르는 마냥.
서로의 집이 반대방향이었기에 개찰구에 들어서며 두 사람은 자연스레 헤어졌다. 선내 진입을 알리는 지하철 소리에 맞춰 고개를 들었을 때 맞은편에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제 볼을 쓰다듬었던 오른손만을 주머니에 꽂아넣은 채로 곧 들어올 지하철을 향해 하염없이 시선을 던져 보내는 그 옆모습을 보다가 문득,
“아마도…… 연인……”
스오우 츠카사는 중얼거린다. 그가 들려준 영화의 제목을 곱씹듯이 천천히 발음했다. 입술이 오므라들 때 혀끝이 앞니를 툭, 하니 때리며 튀어나온 작은 소리와 숨들이 허공 사이로 흩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그날의 전부였다.
그런데 무슨 영문일까, 뜬금없이 그날의 일이 떠오른 까닭은. 그 날이.
“러브송…… 입니까?”
“아아, 유우킁과 나의 연애를 생각하면서 쓴 가사니까 말이지.”
“정말로 끈기가 좋으시네요, 세나 선배.”
"하아? 카사군, 그건 무슨 뜻?"
"별 말 안했습니다."
당신은 손에 들린 악보에 적인 가사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날 당신은 평소보다 얼굴의 움직임이 무척이나 적었다. 물기에 쪼글쪼글해진 나약한 습자지가 지녔을 짧고 가늘고 얄팍해 힘이 없을 실선들을 눈가 옆에 웃음으로 촘촘히 새겨넣다가도 곧 경직된 뺨으로 입술을 옹알거리며 소리를 뱉었다. 입술을 가르고 흘러나오는 그 음들은 숨을 뱉듯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지만, 불가피하게 뱉어야 할 ‘사랑’에 대한 가삿말들은 어색하고 낯설기만 해서, 설익은 말들을 억지로 따내듯이 마음에 있지도 않은 감정들을 시뻘건 혀를 통해 고작 읊어낼 뿐인 당신에게 있어 그 가사들은 보도 위에서 그저 옷깃 하나 스치고 지나칠 뿐인 데면데면한 타자 같아서, 친근함이라곤 제 앞에 나풀거리며 햇빛을 받을 때마다 반짝이는 보풀만큼도 느껴지지 않아서, 제가 말하고 있는 ‘사랑’이라는 게 ‘사랑’이긴 한 건지 의문이 들어서 당신은 어린아이가 벌려낸 입술 사이로 되지 않는 모호한 발음으로 엄마를 홀리듯이 말을 뱉고, 노랫말들은 소리의 높낮이 속에서 힘없이 흐트러졌다.
“어이, 카사군? 제대로 좀 하지?”
어두운 밤길을 홀로 걸어 집으로 귀가할 때 사람은 누구나 어깨를 움츠리고 사방을 쉴 새 없이 쏘아대며 단단히 경직된 움직임을 취한다. 그 길이 눈 감고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낯선 길이라 할지라도. 언제 급습해올지 모를 위협을 대비해. 이처럼 악보 위에 적힌 음들은 스오우 츠카사에게 있어 몇 번 걸으면 눈감고도 걸을 수 있을 낯선 길이 되겠지만, 노랫말들이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익숙한 길을 초면처럼 걷는 행인처럼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음표들을 뱉어내고 있었지만, 결국 지적의 급습이란 찾아오고 말았다.
지적은 언제나 사람을 겁먹게 한다. 경계하게 만든다.
“죄송합니다. 어딘가 음이 틀렸나요?”
“음도 엉망, 가사도 엉망이고 말이지.”
“윽……”
“카사군 말이야, 부르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해?”
“?”
“유우킁과 나의 사랑 이야기라고 했잖아? 사랑이라고, 사랑. 부를 때 떠오르는 감상이라던가, 감정이라던가, 느끼는 바가 있을 거 아니야?”
당신은 눈을 깜빡이며 대답을 뱉기 위해 힘없이 아랫입술을 내렸다가도 다시 다물어버렸다.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사랑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 걸까, 당신은 망설이고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라던가, 좋아했던 사람이라던가 있을 거 아니야. 현재형이든 과거형이든. 첫 데이트라던가, 첫 실연이라던가, 뭐든 한 가지 정도는 있을 거 아니야? 첫사랑 정도는?”
“사랑, 입니까?”
“사랑 노래잖아. 사랑이 있어야 완성되는 게 당연하잖아. 정 안 되겠으면 엄마라도 떠올리면서 불러보시던가.”
“마음이 따뜻하다는 기분으로 부르면 되는 건가요?”
당신은 아직 사랑을 몰랐다, 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불가피하게 그를 붙잡아 물었어야 했고, 곧 제가 뱉은 말들을 부정하듯이 고개를 숙이는 방법밖엔 선택지가 없었다. 첫 구절부터 음악의 끝 후렴구에 이르기까지 당신은 버벅거리고만 있었다. 투명한 창문 너머로 들어가고자 부리로 자꾸만 유리만을 부질없이 쪼아보는 새처럼 제 마음을 두드리고만 있었다.
점 하나 나지 않을 것처럼 굴던 단단한 유리가 부스러지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부리 끝에 조그맣게 묻어나오는 마음이 있었다. 당신은 눈을 감았다 떴다, 연신 눈을 깜빡거리며 바닥만을 바라본다. 무슨 영문일까,
이토록 뜬금없이 그날의 일이 떠오른 까닭은. 그 날과, 그 연인과, 그 눈밭과, 거칠기만 하던 검은 화면 사이로 하얗게 번지던 눈줄기 사이로 엉겨 붙던 두 사람과,
아이스크림이 흘러내리던 손가락과 뺨을 어루만지던 그 손가락과, 그의 웃음과 말,
아마도 연인.
이 소란스럽고 시끌벅적한 세계 속에서 저와 그만이 고요에 잠겨버린 듯 하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있던 탓에 목덜미가 매끄럽게 드러났고, 드러난 목덜미는 보기 좋게 머리카락을 가르고 있었고, 그 주황색의 가닥들로 이루어진 선들을 무수히 시선으로 쓸 듯이 따라가다 보면 그 곳에 그의 뺨이 있고, 눈꺼풀이 있고, 빛을 머금은 눈동자가 있었다. 당신은, 그를 보고 있고, 그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을 느끼고, 손을 흔들며 제 이름을 부르고, 환하게 웃고 있음을 느끼고, 마음이 퍼석거리며 깨지는 소리를 듣는다.
당신은 그 부스러기를 긁어모아, 마음 한켠에 담아둔다. 다음에 노래할 땐 이것을 섞어 숨에 불어 날리자, 당신은 생각한다. 깨진 조각을 혀 위에 올려두고 오래오래 곱씹다 녹여보내자고 생각하다 깨닫는 영화 속 그 사람의 사탕 같은 말은,
사랑,
그 다름 아닌.
혀가 아리도록 날카롭고 세찬 달디 단 사탕.
*
이 밤의 끝에서 당신과 사라지고 싶어.
잇새를 비집고 튀어나온 그 말은 실로 단단해 함부로 깨어 먹을 수 없어, 혀끝으로만 살살 녹여 먹는다. 혀로 훑어내자 달디단 맛을 내며 부드럽게 제 속으로 녹아들고 있었다. 한 사람은 웃으며 그이의 혀를 깨물고 제 혀를 엮으며 침을 뱉는다. 아마도 연인. 또 한 번의 폭설이 내렸다. 두 사람의 몸이 차갑게 식으며 한 덩어리로 얼어붙었다. 폭설의 참혹 속에서 두 사람은 하나의 결정이 된다.
영화의 끝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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