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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짐승

츠키나가 레오 X 스오우 츠카사,




* 치키타 구구 AU / 설정날조 있습니다.




 아래로 내려가는 게 얼마 만인가, 같이 나가자는 말은 농담이 아니었던 모양인지 늦은 아침을 먹어치우기 무섭게 레오는 신발에 발을 꿰며 츠카사를 불러대었다. 밥알이 붙어있는 그릇을 물에 불리기 위해 옮길 시간도 주지 않는다. 따갑게 귀를 때려오는 거친 소리에 츠카사는 한숨을 쉬며 츠키나가 레오의 뒤를 따라 천천히 하산을 시작했다. 발 아래서 바삭거리며 부셔지는 나뭇가지 소리가 들린다. 꺼끌꺼끌한 소리가 뺨을 긁는다. 녹음이 할퀴고 간 자리가 새빨갛게 부어올랐다. 나뭇가지가 몸으로 옮겨 자란다. 색을 빨갛게 틔우며.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밟는다.



산이 끝나는 지점, 입구이자 출구인 길목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끊긴다. 제법 평지같은 모양새를 갖춘 땅이 나타났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날은 무척이나 좋았다. 해가 바르게 떠 있었다. 목덜미에 송골송골하게 땀이 맺혔다 흘러내려간다.

인간들이 사는 마을에 내려올 일은 없었다. 내려오고자 하지 않았다. 6년, 아니 어쩌면 7년만일지도 모른다. 제대로 햇수를 세어보지는 않았다. 그저 마지막으로 보냈던 마을에서의 낮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른 건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

“뭔가 필요한 건 없어~?”

기억할 필요가 없다는 건 딱히 상기할만한 추억이 없다는 말과도 같다. 무심하게 가옥이나 텃밭 따위를 지나치는 츠카사를 향해 레오가 물어왔다. 앞서 가던 걸음을 천천히 늦춰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쌀을 한주먹 쥐어 붓는다면 넘쳐 바닥에 뒹구르르 구를 정도로 쌀통은 가득 차 있었다. 점박무늬처럼 잡곡들이 섞여있기는 했지만, 곡식에 부족함은 없었다. 간을 맞추기 위한 소금도 넉넉했다. 장 따위도 올 겨울은 거뜬히 넘길 정도로 충분했다. 입이래봐야 겨우 두 개 뿐이었기에 식량이 줄어드는 속도가 더뎠다. 레오는 차를 즐기는 성미도 없었기에 찻잎도 넉넉했다. 가끔 레오가 잔을 기울이는 사케도 찬장에 몇 병이나 있고, 사실 그는 인간들이 담근 술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기에 딱히 살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딱히 필요한 건 없지만, 기왕 내려온 김에 사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죠.”

적당히 대답한다. 레오는 가볍게 콧소리를 허공에 날리곤 다시 앞장서 걸음을 옮긴다. 츠카사는 그 뒤를 바지런히 따라 발을 움직일 뿐이다.





본디부터 변덕스런 성미가 그의 한 부분을 구성(構成)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 대상이 제가 되면 곤란하다. 반찬이라든가 갑작스런 부재라든가, 훌쩍 사라졌다가 다시 회귀하는 습관적인 가출따위라면 이제 익숙해져서 괜찮다. 그렇지만 그 변덕스런 성미가 자기 자신에게 적용된다는 건,


“네, 츠카사~ 너는 무슨 색이 좋아?”

어떻게 휘둘려야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익숙치 않으니까 불편하고 또 불편하다.

“역시 빨강색으로 할래? 빨간 옷 좋아하잖아!”

“그렇게 튀는 색은 지금 입고 싶지 않아요. 기왕이면 적당히 얌전한 색이―”

“하지만 빨간 옷, 좋아하잖아?”


금사로 꽃의 형태만을 선으로 수놓은 빨간 단을 만지고 있다. 따로 빛을 뿌려주지 않아도 자체로도 번들거리며 윤이 도는 천이었다. 저런 옷은 입을 일이 없을 것이다. 예뻐보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는 천이라면 우치카케만으로도 충분했다.


“빨간 옷이 입고 싶으신 거라면 저는 그 천으로 하지 않을 거예요.”

“그럼 너는 무슨 색으로 할 건데?”

츠카사는 진열대에 올라있는 단들을 천천히 두루 살펴본다. 마(麻)로 된 천을 고르기엔 이미 계절이 훌쩍 지났다. 겨울옷을 준비한다면 적당히 무게감이 있는 천이 좋다. 광택을 머금고 있지는 않지만 탄탄한 짜임을 자랑하고 있는 흐린 하늘색의 단을 가리킨다.



“이쪽……?”

“흐응, 그 색인가?”

“싫으신가요?”

“딱히.”

“실용적이니 좋아요. 튀지도 않고 때가 타더라도 티나지 않을테고 얼룩도 손쉽게 지워질 거니까요.”


참으로 실용적이었다. 그 지나친 실용성이 츠키나가 레오의 마음엔 들지 않았지만, 그는 ‘그렇구나―’ 끝을 늘어트리며 적당히 대꾸한다. 그는 가게 안쪽의 다다미에 앉아 수를 기우고 있는 주인을 향해 손짓을 한다. 그녀는 부드러운 천이 흘러내리듯 살랑거리는 걸음으로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한 벌의 옷을 지을 것이기에 위 아래가 같은 색이면 너무 우스꽝스러울 거라는 그 말에 그는 적당히 어울리는 색으로 지어주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천을 고른 김에 치수도 재어놓고 가면 칠 일 후에는 옷을 찾아갈 수 있을 거라고 그녀는 말했다. 바느질삯은 필요없다며 웃는다. 안면이 있는 모양인지 레오는 언제나 고마워! 라며 웃었다.


츠키나가 레오가 이토록 친밀하게 대하는 인간이 있었다. 츠카사는 생각한다. 백 년이 아니더라도 인간과 친해질 수는 있다. 그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식용으로 기르는 돼지에게도 이름을 붙여주는 이가 있듯이. 치수를 재어야한다는 말에 츠카사는 그가 몸에 자를 두르는 동안 밖으로 나가 제가 널어놓고 온 천처럼 온몸으로 볕이나 쬐어볼까 싶었다. 겸사겸사 오랜만에 자기 이외의 인간을 구경기도 하면서.



“저는 앞에서 기다릴테니까 끝나면―”

“볼품없는 옷을 좋아하니까 적당히 맞춰줘!”

츠키나가 레오는 츠카사의 손목을 붙잡아 제 앞에 세운다. 그녀와 정면으로 마주서게 된 츠카사는 그녀의 눈동자를 처음으로 보다가 자연스럽게 시선을 흘러내리며 그녀의 콧잔등, 하얀 분으로도 미처 가려지지 못한 턱부분의 짙은 점과 붉은 습자지를 물어 색을 들인 입술을 보다가 파드득 떨며 시선을 아래로 고꾸라트렸다. 무의식중에 이루어진 행위라해도 타인을 품평하듯 훑어내리는 건 좋지 못한 일이었다.



“그렇군요. 정말로 새 옷이 필요하겠어요.”

손목에 살결이 와 닿는다. 손목이 잡힌다. 두 번째. 손목이 드러나있다는 게 문제다.

“이번엔 천이 꽤나 들어가겠어요.”

“아아. 이제 어린애가 아니니까 말이지.”

“진작 데리고 오셨더라면 좀 더 딱맞는 옷들을 만들어드릴 수 있었을 거예요. 언제나 대충 그쯤이라고만 하시니…… 옷이 작아서 불편하진 않았나요?”

“에? 별로…… 아직 잘 맞아요. 새 옷은 필요치않아요.”



필요치 않다고 말한다. 그는 필요할 거라 말한다. 손목정도 소매 밖으로 드러났다고 해서 생명에 지장이 올만큼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당장은 필요치 않다고 말한다. 츠키나가 레오는 앞으로도 필요할 것이라고 말한다. 앞으로도 옷을 지어야 한다고 말한다. 저는 자라고 있으니까, 나이를 먹고 있으니까, 시간이 흘러가고 있으니까.

나이를 먹는다는 건 몸이 커진다는 뜻이고, 몸이 커진다는 건 그만큼 시간이 흐른다는 말이고, 그 말은 머지않아 백 년이 채워진다는 소리이다. 그의 말대로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옷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필요없지 않은가, 잡아먹고나면 남은 옷들은 누가 갖는단 말인가. 태워줄 위인이 못 된다. 그는. 츠카사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



“그럼 레오말대로 새 옷을 받아줄테니까 내 말도 들어줘요.”

라고 말한다. 츠키나가 레오는,

“뭐든!”

이라고 답한다.

츠카사는 향나무 묘목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앞으로 커나갈 묘목이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츠키나가 레오는 비어있던 뜰을 떠올리며 알겠다고 말한다.

“왜 향나무야?”

“제일 단단할 것 같으니까요.”



박(樸:통나무, 쪼개지 아니한 나무)이 좋으리라. 무엇을 만들어도 단단할 것이다. 어쩌면 이름 그대로 내음이 좋을지도 모른다. 제 곁에서 깊은 세월동안 뿌리를 박으며 쉴 새 없이 흙들을 파헤치고 어루만지고 우그러트리며 우꾼히 몸통을 키워갈 향나무라면 어쩌면 아주 좋은 장이 될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넣고 잠글 수 있는.





*




시가에서 볼 일은 크게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츠키나가 레오의 용무란 제 새옷을 맞추는 일 뿐이었던 모양으로, 옷가게를 나오자마자 미련조차 두지 않고 가방(街房:가게가 죽 늘어선 거리)을 뒤로 두며 걸음을 달리했다. 다른 볼일이 있던 건 아닐까 우려를 표했지만, 태평하게 시가를 벗어나는 끝자락에 위치한 노점상에게 호객행위를 당하고 있는 꼴을 보니 걱정할 마음이 싹 씻겨나갔다. 겉에 딱딱한 설탕물이 굳어있는 딸기가 구슬처럼 꿰어져있는 꼬치를 내미는 그가 천역덕스럽게 웃는다.



“좋아하지? 과일사탕.”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양손을 모아 공손이 받아들곤 한 입에 물었다. 철이 철이니만큼 딸기는 작았고 자체로는 맛이 없었다. 물엿의 단단한 단맛만이 찐득하게 혀를 싸고 돈다. 단단한 물엿이 녹으면 안에서 물엿에 재워졌던 딸기가 흐물흐물하니 녹아 혀 위에 제 몸으로 한덩이의 살점마냥 들러붙는 기분을 느낄 수가 있었다. 혀 위에 얹혀진 하나의 딸기를 느끼며 츠카사는 그리 변하지도 않고 꽤나 변한 거 같기도 한 풍경들을 훑어낸다.



방간(坊間)엔 놀랍도록 변화가 없었다. 제 기억과 다르게 실제와 착각을 불러일으킬 법한 요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착각할 여지가 없는 풍경들을 츠카사는 천천히 감상한다. 마지막으로 타고 올랐던 담장 너머의 매실 나무가 그대로 남아있을련지 모르겠다. 이제는 밑둥만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츠카사는 조용히 딸기를 씹는다. 흐물흐물해진 빨간 사체들이 목구멍 뒤로 넘어간다.



“너하고 외출하는 건 꽤나 오랜만이네~너무나 간만이야~”

간만이라고 치기엔 몇 년이다. 인간의 시간으로 치면 지난히 긴 시간이었지만, 영생하는 요괴의 시점에서 본다면 몇 달, 아니 며칠과 다름없을지도 모른다.

“나올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땅 속에서 올려다본다면 손을 잡고 있었을 뿌리들을 생각한다. 그 수많은 뿌리들을 얼기설기 엮어 삼 하나로 만들 듯이 촉수같은 뿌리를 얽고 있던 매실 나무와 대추나무가 맞이한 늦여름. 초록 매실 옆에 설익은 연둣빛 매실이 너무도 단단해 발 아래서 으깨지지 못하던 늦여름.



방간은 변화가 없었다. 지독할 정도로 변화가 없었다. 입안에 넣은 빨강을 씹기만을 열중한다. 살점이 모두 뜯겨 여윈 뼈대만 남은 꼬치의 끝에 정오를 넘겨 오후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태양이 새로운 살점으로 꿰인다. 햇볕이 강했다. 손가락이 따가웠다. 드러난 손목도 따가웠다. 목덜미에 들러붙는 볕들이 몹시나 따가왔다.

“집에 돌아가고 싶어요.”

그는 아직 딸기가 꽂혀있는 꼬치를 들고 있다. 입가에 묻은 설탕물은 딸기에 물들어 마치 입술이 터져 흘러내리기라도 한 피처럼 보인다. 피일까. 생각한다.

“벌써? 아직 한창 낮인데.”

대추알은 단단했다. 쉽게 으깨지지 않았다. 그의 발은 대추를 으깰 수 있었다. 껍질같은 과육 연둣빛 새싹같은 매실은 쉽게 물러지고 씨만이 단단하다. 그는 씨는 먹지 않는다. 그는 단단한 뼈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매실도 먹지 않는다. 대추도 먹지 않았다. 아직 빨갛게 익지도 않은 대추알을 이로 물어뜯었을 뿐인데 그의 입가엔 왜 붉은 대추껍질이 달라붙어 있었던 걸까.



“돌아가서 할 일이 많아요. 여기서 시간낭비할 순 없어요.”

“하루쯤 미룬다고 죽지는 않잖아.”

그는 먹다 남은 사탕꼬치를 바닥에 내팽개친다. 붉은 빛에 매료된 흙먼지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든다. 색이 으깨지고 있었다. 그의 발 아래서.

“그렇다고 볼일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여기 있고 싶지 않아요.”

“그래? 머물러있는 걸 꽤나 좋아한다고 기억하고 있는데 말이지.”



오래 산 만큼 오래 된 기억들을 간직하고 살아가야하는 거라면 그 시간과 비례해 속에 새겨놓은 말들이 많을 것이 분명하다. 긴 시간을 지내온 그에겐 고작 십 년 남짓의 기억을 살아온 자신보다도 많고 많은 기억을 제 안에 저장하고 있을터이니, 하여 한 두 개의 시간정도는 잊고 지내도 되지 않을까. 그는 왜 망각을 하지 않을까. 인간이 아니라서.



“이제 좋아하지 않아요.”



그러니 돌아가자고 말한다. 츠키나가 레오는 향나무가 보고 싶지 않냐고 말한다. 츠카사는 지금은 그 어떤 나무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대추고 매실이고 그 무엇도 필요없다. 마지막으로 그는 과일사탕은 참으로 맛이 없었다고 말한다.



볕이 뜨겁고 홧홧한 열기로 뺨이 상기되어있었고 덩달아 목덜미까지도 번진 붉은 나염이 어째서인가 눈물을 쏟을만큼 온몸을 아리게 만들어서 츠카사는 걸음을 빨리하고 그 운율에 맞춰 눈물방울 고작 서너개를 떨어트려 보냈다. 발 아래로 짓뭉개지는 것이라곤 제 검은 그림자, 그리고 뒤를 바싹 추격하듯 따라오는 바람에 제 몸을 덮는 츠키나가 레오의 그림자뿐. 검은 그림자 하나가 너무도 굳건히 덮고 있어 츠카사의 검은 못은 뽑혔다 사라지는 일이 없이 천천히 번지듯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고.



변하지 않은 방간의 반대편 끝자락에 있는 가옥의 대추나무에는 제법 큰 알맹이가 맺혀들고 있었다. 그 아래로 그림자가 져 있었고 집은 인영 하나 보이지 않아 살풍경하다. 틀을 덮고 있던 창호지를 모조리 벗겨내 깨끗하게 갈아내었다고 생각했는데 구석에 산화되면 어느새 타고난 결처럼 자리잡은 핏방울 몇이 스며들어 길고 깊은 선을 그리고 있었고.

그 집의 장남은 7년 전 여름, 민가를 덮쳐온 들개들에 의해 목이 뜯겨나갔다. 그렇게 몇 집의 계집애와 사내들이 7년 전 여름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 죽어나갔다. 그때 그들은 열 살이었고, 츠카사는 열 살 이후론 마을에 내려가지 않는다.


*




오랜만입니다. 어느새 가을날이 되었네요. 부디 몸 조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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