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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스타

tragédie - 1

엘리스.aliceeli 2016. 11. 7. 16:50

* 설정날조, 왕궁물로 레오츠카가 보고 싶어져서 쓰긴 썼는데……




24절기를 모두 붙들어 제 몸에 붙여낸 4계절들을 통틀어서 쌓은 시간의 공든 탑들을 서력이라 말하던가, 내력이라고 불리우던가. 이곳에선 천력이라고 읊어지는 그 이름은 실상 텐쇼인 가문의 내력이라고 이름 붙이는 편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일국의 흥망성쇠에 그토록 친밀하고 밀접하게 생과 사를 함께 한 자들은 없을뿐더러 일맥상통하고 있던 가문은 없었기에.

텐쇼인 가문에 장자가 태어나면 그는 훗날 황제가 된다, 황자가 되기도 전부터 그는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과 지위를 갖는다. 지는 해와 떠오를 해를 저울질해본다면 쉬운 일이다, 사람은 언제나 저물어가는 현재보다야 한줄기 피어오르는 미래에 판돈을 걸기 마련이다.

텐쇼인 가문의 장자를 두고 벌려지는 도박은 장자가 태어날 때마다 새로이 판을 뒤집었다. 어제의 미래가 해가 뜨면 해묵은 과거가 되어버린다, 오늘은 또 오늘의 태양이 떠오르고 신선한 판돈이 내걸린다. 황제의 기둥으로 남을 것인가, 새로 축조될 장자의 주춧돌이 될 것인가, 내거는 건 언제나 가문의 장정한 아들들 혹은 샛파란 핏덩이와 아직 빛도 보지 못한 복중의 태아까지도.

가냘픈 희망이 거머쥔 승률로 하여 한 번이라도 권력을 움켜쥔 손맛을 보았던 이들은 부질없는 이 도박판을 떠나지 못하는 법이었다. 스오우 츠카사(朱桜 司)가 태어난 집안도 예외는 아니었다.


스오우 가문으로 말하자면 장자인 츠카사가 태어나기 이전까진 값을 잘 쳐 줘봐야 헐값으로, 지방의 돈 많은 지주 정도나 되었을까, 명망 높은 집안은 한사코 아니었다. 가문이 거느리고 있는 가병(家兵)이래봐야 집안에 수저를 나눠 쓰는 식솔까지 합쳐 300명도 채 안 되었고, 그중 태반이 격납고에 있는 창보다야 땅을 갈구는 괭이가 더 걸맞은 손을 지니고 있었다. 사람 목은커녕 들판에 자란 잡초나 풀 포기나 베는 낫질이 더 어울리는 풍요롭고 안락한 씀씀이를 가진 것이 그 가문의 장점이라면 장점일 수도 있겠다.

봄볕처럼 온화한 미소를 지닌 안주인의 마음만큼이나 풍요로웠던 평야에 봄이면 식솔들은 씨를 뿌리고 새순이 돋아나길 기다렸다. 여름 폭우에 돋아난 싹들이 휩쓸려가지 않도록 서로 보초를 서가며 여린 씨들을 지켜내었다. 뙤약볕에 송골송골 맺힌 이마의 땀들을 서로 닦아주고 북돋아가며.

가을이면 황금 들녘을 쏘다니며 낫질을 해대었다. 한단, 두 단, 제 뒤로 저무는 석양을 가릴 정도로 높게 치솟은 볏단들을 보며 서로에게 올해도 수고했네, 자네가 수고했네, 서로에게 공을 떠넘기며 그들은 풍년을 자축하며 이 모든 게 씀씀이가 좋은 주인댁 덕분이라며 웃음을 나누었다. 겨울엔 잠을 잤다. 겨울잠을 자는 생쥐처럼. 약소한 일들을 도맡아 하며 겨울을 이겨냈다. 백설白雪을 덮은 땅이 잘 땐 그들도 잤다. 두터운 솜이불 아래서.

천력 134년, 풍년이 들었던 그 이듬해, 가뭄이 찾아왔다. 그해는 흉작이었다. 곡창에 쌓아두었던 곡식이 바닥이 났다. 식솔들은 저마다의 입을 줄여가며 퍽퍽한 땅을 돌보았다. 그 이듬해는 설상가상 지나치게 풍요로웠던 장마로 인해 풀들이 모조리 씻겨나갔다. 식솔들은 또 한 번 입을 줄여가며 그해 겨울을 보냈다. 사정은 나아지리라, 폭우만큼이나 거세었던 겨울의 폭설 속에서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면 그해 농사는 풍작이라더라’는 속설을 주문처럼 외고 다니며.

한번 찾아온 가난의 사정이란 좀체 물러서는 법을 몰랐다. 벗어날 수 없는 소용돌이에 갇혀버린 송장처럼 집안의 가세는 내려앉았다. 식솔들을 모조리 놓아주었다. 못潭을 마주 보고 있는 평야와 선산 몇을 제하고 모조리 처분하였다. 유지보다도 더 이상 그 땅을 돌볼 손이 없었기에 방도가 없다는 말이 옳을 터였지만, 당시 스오우 가문의 당주當主이자 츠카사에 조부祖父에 해당하던 노인은 집안의 가세가 기우는 모습에 대한 진노와 화병을 이기지 못하고 끝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문제랄 건 없었다. 그 누구의 무능도 탐욕 탓도 아니었다. 탓할 거리라곤 조막만 한 인과 하나도 손바닥에 쥐어지지 않았다. 쥐어진 건 단지 퍽퍽한 하늘의 인심밖엔 없었다.

츠카사의 조부가 죽던 그 날은 그해의 첫 봄꽃이 저물었다. 스오우 가문에 꽃이랄 건 더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한참을 비비고 비빈 탓에 눈앞에 어른거리던 빛의 세심한 살들이 거둬지고 난 후에도 없었다. 눈을 찔러오는 건 초여름의 세찬 뙤약볕과 그을다 못해 검게 타들어 간 그늘들뿐.

이렇게나 햇살이 밝은데 그늘이 몹시도 어두워, 스오우 가문의 당주-츠카사의 부에 해당할 그의 얼굴도 한 치 앞을 못 보는 늙은이처럼 어둡다. 출구가 없는 까마득한 동굴 속에서 벽을 더듬듯이 그는 제 앞날을 살아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 우고 있었다.

식솔의 입이 반으로 줄었다. 반으로 줄인 수에서 또 반으로 줄였기에 남은 이들의 수는 고작 70여 명 남짓. 그조차도 연로한 탓에 갈 곳 없어 머무는 형편의 얼굴이 쪼글쪼글하게 주름든 노인들이 전부였다. 마음씨 좋은 자신의 처 妻는 올해의 풍작을 바라며 물 한번 제대로 묻혀본 적 없을 고운 손으로 낫질을 시작했다. 굳은살 한 점 없이 새털구름처럼 보드라웠던 손에 수포 같은 물집이 잡히기 시작했다. 가난의 흔적이다.

“좋은 날이 있으면 반대되는 날도 반드시 있기 마련이죠. 저는 괜찮답니다. 오히려 이렇게 흙을 밟고 서 있으면 고향에 돌아간 듯 기분이 편안해져요. 사람이 죽어서 흙으로 돌아간다지요? 그 말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랑 아니 다르겠어요? 저는 다 괜찮답니다.”

얼토당토않는 소리. 그는 혀를 찼지만, 소리 내어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그저 흙이 잔뜩 묻은 제 처의 손을 힘주어 잡았을 뿐. 굳은살이 촘촘히 박히기 시작했지만, 크기가 매우 작아 흡사 흙장난을 친 어린아이마냥 작고 또 자그마한 손을 힘주어 쥐었을 뿐이다.

그녀는 알고 있었을까, 눈가에 맺힌 땀을 닦느라 보지 못하고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이의 얼굴에 드리운 응달이 너무 깊은 탓에 환히 웃자, 환하게 웃어 보이자, 환히 웃어 그의 얼굴을 밝혀주자며 애쓴 탓으로 눈치채지 못한 연유를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웃을 때, 그는 힘주어 그녀의 손을 잡았고, 그녀가 다시 뒤돌아 흙을 밟으며 미래의 풍작을 꿈꾸고 있을 때, 그는 제가 도박에 걸 판돈을 맘속으로 셈 치고 있었다.

얼마 전 텐쇼인 가문의 장자가 제 지방으로 내려왔다 들었다. 연유는 모르나 이것은 천운이 아닌가. 그 세력에 가담하는 일만 가능케 된다면 기운 가세를 일으켜 세우는 건 시간문제랄 것도 없었다. 일으켜 세우기만 할 뿐인가? 정계에 진출해 그럴싸한 자리 하나를 얻게 되는 것은 물론이요, 아니, 권력이란 것도 필요 없다. 그저 허울만 번지르르한 자리 하나라도 꿰차게 된다면 그간 아내가 해온 고생에 대한 보상은 물론, 고개를 들 면목이 생긴다. 계획은 완벽했다.

허나, 판돈이랄 게 없었다.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토지들도 토막났을 뿐더러 더 이상 팔아치울 여유란 없었다. 지금 있는 토지로는 선산을 유지하기가 고작이었다. 수가 필요했다. 그 수가. 그렇지만 수랄게 무어가 있단 말인가. 당장 한 수 놓을 여력조차 주어지지 않은 그에겐 도박이란 눈앞에 피어난 아지랑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절대로 손에 쥘 수 없을 것이다. 운이 나쁘다면 평생 이 꼴로, 변변찮은 모습으로……

하늘이 그를 버렸다고 생각했을 때 동아줄이 내려왔다. 바로 제 처의 뱃속에 자라나기 시작한 저의 새끼가 쥐고 있는 탯줄이었다.

“당신은 딸이 좋아요? 아들이 좋아요?”

딸이라도 아들이라도 상관없다. 딸이라면 후첩으로라도 만들어 텐쇼인 가문과 연을 묶는다. 아들이라면 기왕이면 사지 멀쩡하고 탄탄한 놈이 좋겠다, 판돈으로 가치가 있을 놈.

“당신?”

“아들도 딸도 상관없어.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좋지.”

“역시 그렇죠?”

아내는 피어난 목화솜처럼 하얗게 웃었다. 말갛게 피어나는 그 웃음을 향해 그도 환히 웃어주었다.




금년에는 마당에 금앵초(金櫻草)가 돋았다. 열흘이나 이어진 장마 탓에 사나운 빗줄기에 뜯겨나가진 않았을지 걱정했는데, 열흘 전에는 분명 손바닥 한 뼘만큼 돋아나 있던 푸른 줄기는 고새를 못 참고 쭉쭉 고개를 피더니 어느샌가 무릎께까지 자라 있었다. 게다가 콩알만 하던 꽃봉오리까지 대롱대롱 매달고선. 스오우 츠카사는 내심 앵초의 안부를 걱정하고 있던 탓이었기에 자그마한 고개를 수줍게 떨군 꽃봉오리를 본 순간 저도 모르게 해사한 미소를 짓고야 말았다. 오죽 수줍었던지, 꽃의 얼굴은 붉게 달아오르다 못해 파리하게 질린 보랏빛이었다.

꽃이 자라나면 텐쇼인 형님에게 가져다주자. 검지 손끝으로 꽃봉오리를 슬며시 쓰다듬는 앳된 얼굴의 그는 요 며칠 마주치지 못한 텐쇼인의 안부를 걱정한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가 벌써 나흘 전이고, 안색이 꽤 나빴다, 이전부터 보아온 그 여느 때보다도. 작년 가을 끝물에 걸렸던 열병 때보다도 짙은 흙빛의 낯빛이나, 올 정초에 내뱉던 기침보다도 세차던 콜럭거림을 생각하면 걱정이 가슴 한 켠에 물밀 듯이 치대며 덮쳐왔다. 괜찮다, 예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항상 씻은 듯이 나을 테지, 평소처럼 온히 웃는 면으로 저를 불러올 테니 괜찮다, 꼼작 없이 누워있느라고 등이 배긴 거 같다며, 말동무가 없어 혀가 굳어버린 거 같다고 투정을 부려올 테니 괜찮다,

하고 말해보아도 두려움은 마음 한속에서 자그맣게 타오르기 시작해선 좀체 꺼지지 않는다. 자꾸만 자꾸만 살아나는 불씨처럼 죽음을 향한 두려움이 죽지 않고 살아났다. 무척이나 끈질긴 생물이었다.

우려와 달리 텐쇼인 에이치는 쾌유를 목전에 둔 얼굴로 스오우 츠카사를 반기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핏기가 씻겨나간 얼굴로. 허옇게 분칠을 바른 양 두 뺨은 물론이고 눈두덩이가 허여멀건 했다. 곁에 두른 내의內衣가 수의壽衣를 서둘러 입혀놓은 건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그이의 안색이 창백하다.

“어서 와, 보고 싶었어.”

“몸 상태는 좀 어떠세요? 이제 정말 괜찮으신 게 맞는 거죠?”

“보시다시피 언제나처럼 건강해.”

“매번 건강해, 하고 말씀하시지만 그거 아세요? 사흘도 못 가서 다시 앓아누우시는 거?”

“저런…… 걱정을 많이 했나 보네.”

안쓰러운 소동물을 돌보듯이 에이치는 눈을 접어보 이며 웃었다.

“기침이 심했잖아요. 갑자기 픽 쓰러져선 달달 떨질 않나……”

“많이 무서웠구나. 이젠 괜찮아. 겁먹지 않아도 된단다, 그러니 가까이 와서 네 이야길 좀 해줘.”

“제가 무슨 재롱꾼입니까. 이제 더 이상 할 이야기도 없어요. 제가 알던 이야기는 텐쇼인 형님께 다 해드렸으니까.”

“요 며칠간이 있잖아. 내가 듣지 못한 네 이야기.”

“네?”

“어떻게 지냈는지 좀 들려줘. 알고 싶어서 그래.”

방으로 들어서기 전 귀찮게 해서는 안 된다고, 텐쇼인 에이치의 간병인이자 보호자를 도맡고 있는 하스미 케이토에게 주의를 받은 터였다. 소란스러운 제 말소리가 겨우 찾은 에이치의 안정에 해를 끼친다는 게 이유였다. 지금 그에겐 절대 안정이 최우선순위이니 조곤조곤히 또 조용하게 속삭이듯이 말하라는 게 명이었다.

“무슨 일이야? 평소보다 목소리에 힘이 없는걸.”

“점잖게 말하려고 하는 거뿐이에요. 저도 언제까지나 어린애가 아니니까요.”

“츠카사는 언제까지나 어린애인 편이 좋은데.”

“무슨 말씀이세요.”

“그편이 좋아.”

“자라지 말라는 말씀이세요? 저도 언제까지고 어린애가 아닙니다. 이제 어엿한 사내라구요.”

“그렇지. 사내…… 사내라…… ”

그 말이 무슨 중한 말이라도 된다고, 텐쇼인 에이치는 음미하듯 곱씹으며 한참을 되뇌여 중얼거렸다. 제가 무슨 이상한 말이라도 했나요? 묻는 츠카사의 질문에도 고개만 저은 채로 미소만을 얼굴에 띄어 올리고 있다. 환기를 위해 살짝 벌려둔 창문의 잇새로 바람이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덩달아 두 사람의 머리칼이 바람 따라 하늘하늘 힘없이 흔들렸다. 그는,

“네가 어른이 되었구나.”

중얼거리며 창밖을 내다본다. 꼼꼼한 시선으로 창밖의 모든 풍경을 훑고 있다. 몇 날이고 몇 년이고 이 자리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내다본 정경이기에 그다지 새로울 색도 색다를 풀도 없을 그 공간을, 텐쇼인 에이치는 한참이나 공들여 바라보고 있었다.

“무얼 그렇게 보고 계셔요.”

침묵을 깬 건 츠카사 쪽이었다. 할 일 없이 누군가의 뒷모습을 들여다보는 취미도 없었을뿐더러, 그런 안락함을 느낄 여유가 그에겐 없었다. 상대가 텐쇼인 에이치였기 때문에.

“창밖을 내다보고 있어.”

“항상 보시잖아요. 뭘 새삼스럽게 꼼꼼히 보시느냐는 말씀이에요.”

“기억해두기 위해서.”

뜻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츠카사를 향해 고개를 돌린 그는 웃고 있었다.

“혹시 까먹을지도 모르잖아.”

“내일 또 보실 풍경이시잖아요?”

“내일 못 보게 될지도 모르지.”

불안함이 엄습해온다.

“또 허튼소리를 하고 계시네요. 정말 영문 모를 말씀만 하세요.”

“후후…… 그런가?”

“다 나으신 게 사실이신 모양입니다. 허튼소리 할 여유도 있으시고.”

“그렇지만 허튼 소리가 아니야. 내일 못 보게 될지도 몰라.”

“자꾸…… 자꾸 이상한 말씀 하지 마세요!”

언성을 높여선 안 된다고 그리도 주의를 들었건만, 그는 충동적인 제 언사에 놀라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숨을 내쉰다. 차분하게 가라앉을 수 있도록, 천천히 또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제 속에 품었다 뱉었다. 조금 진정이 되었다.

“저런, 화난 모양이구나.”

성이 난 나머지 떼를 부리기 시작한 어린아이를 달래듯 나긋한 목소리였다.

“이상한 말씀만 하시니까……”

“웬일로 솔직히 인정해주는 걸까?”

침묵. 오늘따라 침묵이 잦다. 츠카사는 말없이 양손을 모아 쥔 채로 꼼지락거리고만 있다.

“정말로 내일 못 볼지도 몰라. 오후의 창밖 풍경은. 여기서 너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창밖을 내다보는 게 내 유일한 낙이었는데 말이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창밖을 내다보는 그의 옆모습이 쓸쓸해 보인다.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간지럽힌 탓에 자꾸만 얼굴선이 흐트러져서, 그의 이마도, 콧날도, 자꾸만 뭉개져 간다. 어쩌면 바람 탓이 아닐지도 모른다. 뜬금없이 저물어가기 시작한 석양빛이나 그로 인해 자꾸만 탈바꿈되는 공기의 색이나 온도나, 제게 뭉개지는 빛들이 따가와서, 따가와서 눈이 아프고, 아픈 눈이 자꾸만 멋대로 물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일,”

무슨 영문일까. 목이 잠겨있다. 목소리가 축축하게 젖어 늘어진다. 자꾸만 물기에 잠겨 드는 목소리가, 말이, 꼭 냇물에 던져놓은 돌만 같이 무겁다.

“내일 또 보면 되잖아요.”

“츠카사.”

그가 저를 불러, 고개를 들어 올린다. 시선과 시선이 맞닿았다. 두 줄기의 시선이 한 개로 포개어졌다. 약간의 뜸,

“나와 같이 수도 首都에 가지 않을래?”

두 사람은 마주 보고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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