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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스타

tragédie - 2

엘리스.aliceeli 2016. 11. 7. 16:52

* 왕궁물로 레오츠카가 보고 싶어서 쓰기 시작했는데 레오가 등장이 1도 없어서 슬픈 글.....




열일곱이란 나이가 무색하게 스오우 츠카사는 세상 물정이란 몰랐다. 아마도 그건 그가 열일곱이란 나이가 다 되도록, 그만큼의 계절을 오직 제 가문의 둥지 속에서만 자란 탓일지도 모른다.

수도, 수도라…….

늦은 밤이 되었지만, 쉽사리 잠들 수 없었다. 서로가 공들여 시선만을 겹이어 가고 있을 때, 스오우 츠카사가 망설임으로 고개를 떨구었던 그 순간, 텐쇼인 에이치는 농담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가지런한 손가락으로 손등을 쓰다듬어 오고 있었다. 떨쳐낼까 싶은 두려움이 짙게 배어든 손짓이었다. 잘 길들인 애완동물을 간지럼 태우듯 혹 칭얼거리는 갓난아이의 입가에 물린 손가락질처럼 상냥했던 손짓에 스오우 츠카사는 그저 제 잇새로 아랫입술을 밀어 넣어 깨무는 일밖엔 할 수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자근자근 제 입술을 거듭 질겅이고 깨물며 뜬눈으로 고민만 하고 있다.

허물처럼 부르튼 입술이 자꾸만 뜯겨나갔다. 고심만큼 입술에 주름이 쌓였다 풀어지고 단단히 다물었던 입술 새가 한숨으로 허물어졌다. 내뱉는 숨소리는 한없이 가볍게 공중으로 날아가 버리고 마는데 미처 내몰지 못한 고민이 자꾸만 응어리졌다.

내가 너무 성급했지, 네게도 생각할 시간을 주었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네가 죄송할 일은 아니잖니, 갑작스레 말한 내 탓이야, 텐쇼인 형님……, 내일 정오쯤에 수도로 가게 되었어, 아무래도 그편이 내게 좋을 거라더군, 병환 때문인가요?, 여러 가지 어른의 사정이랄까……,

이렇게 갑작스럽게 수도로 가야하는 사정을 그는 끝끝내 말해주지 않았다. 병환이 깊어진 걸까, 혹 이젠 수도에 가지 않으면 고칠 수 없을 정도로 병세가 깊어진 모양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혹 잘못된다면 영영…… 두 번 다시 그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힘을 주어 제 앞섶을 쥐었다. 주먹을 쥐어 가슴을 쿵, 쿵, 내리쳐보았다. 제대로 차려 먹지 않은 저녁이 문제였을까, 체기가 오른 양 가슴부터 명치에 내리기까지 답답했다. 손이 찼다.

네 덕분에 지난 십 년간 심심치 않았어. 고마워, 츠카사.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

형제와 같은 사람이다. 십년, 햇수를 틀려도 단단히 틀렸다. 무어가 십년이란 말인가, 화려한 수도생활만 즐기다 이런 시골에 틀어박히다 보니 날을 세는 법도 잊었나, 병세가 깊어 누운 날이 더 많아 햇수를 착각해도 단단히 착각했다. 자그마치 십 이년이다……. 다섯 살배기 어린아이 재간이래봐야 옹알이나 몇 가지 말도 안 되는 몽상으로 부풀어진, 칭얼에 가까운 놀이가 그 무어가 재미있다고 제 곁에 붙들어 두었는지, 이렇게 떠날 거면 뭐하러 정이란 걸 붙였단 말인가.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눈이 뜨거웠다. 엉망진창으로 원망을 더 하는 바람에 가슴에, 발끝에, 그토록 차던 손끝까지도, 더불어 눈에도 열이 몰린 모양이었다.

자꾸만, 자꾸만 엉뚱한 말을 해서 성이 난 거라고, 성이 나서 참을 수가 없는 거뿐이라고, 그렇게 다독이며 스오우 츠카사는 아주 조금, 눈물을 흘렸다. 온몸이 뜨거웠다. 열이라도 난 건지도 몰라, 열이 많이 나면 눈물이 자꾸 나니까…….




마당에 금앵초가 만개했다. 앞뜰 전체가 보랏빛 천지다. 정신사나울 정도로 혹독하게 눈을 찔러오는 진한 빛에 스오우 츠카사는 눈을 찔끔, 감으며 뒷걸음질 쳤다. 아침 밥상도 뜨는 둥 마는 둥 한 탓에 밥상머리에서 아버지께 주의를 받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평소라면 진절머리 날 정도로 자책하느라고 끙끙거리며 방에 틀어박혀서 서책을 읽으며 마음을 돌봤거나 마당의 꽃들을 상대로 중얼거리며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겠지만, 오늘만큼은 사정이 달랐다. 안색이 좋지 않았다. 간밤에 쉬지 않고 뒤척이느라 잠을 설친 탓이었다.

만개한 금앵초를 보아도 기분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만개하면 무얼 하나, 이토록 화사하고 아름답게 피어나면 무얼 하나, 줄 사람이 없는데…… 자그마한 한숨을 뱉는다. 한숨이 퍼져나가며 바람이 되고, 바람이 되었던 한숨이 다시금 그에게 돌아와 자꾸만 또 다른 한숨을, 더 큰 숨을 뱉게끔 만들었다. 한숨이 한숨을 만든다.

조심히 몸을 옮긴다. 한 걸음 한 걸음씩 내딛으며 금앵초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시야를 후려쳐오는 보랏빛이 참으로 고왔다. 고와서, 스오우 츠카사는 꽃을 꺾기 시작했다. 한 송이가 두 송이가 되고, 어느새 한 아름 제 품에 들어왔을 때, 짓이겨진 줄기로부터 펼쳐진 푸른 물이 제 손톱 새로 파고들어 왔다. 푸르게 물든 손으로 다발 꽃을 품에 고이 안은 채로 스오우 츠카사는 뒤돌아보는 법도 없이 대문을 나섰다.

변변찮은 작별인사라도 하고 오지 않으면 후회한다. 정오에 떠난다고 했을 테니 필시 아직 떠나지 않을 게 분명하다. 서둘러 뛴다면 작별인사는 물론이고 평소를 가장한 대화 몇 마디라도 나눌 수 있을 터였다.

츠카사는 서둘러 뛰다가 바닥에 불쑥 솟아오른 돌멩이를 보지 못했다. 헛발질로 넘어지는 바람에 팔꿈치가 크게 까이고 말았지만, 신음 한 번 내뱉지 않은 채로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무릎에 흙이 잔뜩 얼룩져 있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쉴 수 없었다.

잔기침을 토하는 일로 제 숨을 달래가며 서둘러 뛰어왔는데도 불구하고 그 어디에도 사람의 그림자 한 점 묻어있지 않았다. 방은 물론이고 마당에도 텐쇼인 에이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어디에 흔적 하나 남겨두지 않은 채로 텐쇼인 에이치는 떠나갔다, 떠난 게 분명했다.

이토록 무색하게, 그토록 무색하게, 제 모습이 무색했다. 손안에 들린 꽃이나, 잔뜩 더럽혀진 무릎깨나, 모든 게 무색했다. 코끝이 시큰거렸다. 울음을 참으려고 힘을 주니 목 안이 따끔따끔해진다. 손등으로 힘을 주어 눈을 비비려는데, 손등에 들러 붙어있던 흙먼지가 눈에 들어간 탓인지 따끔따끔해 그만 눈물을 쏟아버리고 말았다. 그때, 목소리가 들린다.

“츠카사?”

건물 한쪽에 자리 잡은 응달에서 그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햇빛을 받은 머리가 쨍하니 눈부시다. 하얗게 빛이 난다. 평소처럼 차려입은 무염(無染)의 옷도, 색소가 엷은 금발의 머리칼도, 흰 구름을 한 움큼 풀어다 놓은 하늘 같은 눈도 하얗게 빛이 났다. 그 모습이 너무 반가워서, 스오우 츠카사는 그만 울어버리고 말았다.

변변찮은 짐보따리도 없어 홀몸이나 다름없는 스오우 츠카사는 그길로 텐쇼인 에이치를 따라 수도로 떠났다. 아버지의 반대랄 것도 없었기에 집을 떠남이 수월했던 탓도 한몫했다. 이미 오래전에 세상과 등져버린 어머니의 유품 앞에서 합장하는 일만으로 스오우 츠카사는 제가 오랫동안 몸담았던 집과 작별했다. 바닥에 자라난 풀 포기 하나, 제집 앞마당에 피어오른 꽃은 물론이고, 눈을 감아도 선하게 눈앞에 떠오르는 마당 풍경 속에 웃고 있는 어머니도, 모두 내려둔 채. 이곳에서 떠오른 해는 그곳에서도 떠오른다, 분명 이곳에서 퍼져나간 구름은 제게도 당도할 테니…… 아주 조금 멀어지는 것뿐이다. 버려두는 게 아니다. 아주 잠깐 멀어지는 거 뿐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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