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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스타

tragédie - 4

엘리스.aliceeli 2016. 11. 7. 16:52

천력, 157년. 텐쇼인 가문을 주축으로 이루어졌던 중앙집권체제에 각 지방의 관료와 가문들의 반란이 들끓었다. 명목은 그럴 듯했다. 지난 백여 년간 이어진 텐쇼인 가문의 독재를 막아낸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으며, 노쇠한 왕이 더 이상 제대로 된 정치를 펼칠 수 없어 실리에 어긋난다는 게 두 번째 이유, 마지막은 텐쇼인 에이치. 그의 존재였다. 후계로 책봉되었던 그는 대체 어디로 사라졌기에 그 모습을 왕궁에서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인지, 그가 살아있기는 한 건지, 건재하다는 말만 앞세우지 말고 하루빨리 그를 왕위에 올려 실책을 방지하고 제대로 된 왕권을 건사해 보이라는 게 반정 세력의 주장이었다. 건사하지 않다면, 반정 세력을 주측으로 온건한 가문의 장자를 뽑아 황제의 자리에 올리겠다, 라는 문장이 적힌 편지가 제 손에 닿았던 그때, 텐쇼인 에이치는 창밖을 바라보았고, 저물녘의 물빛 하늘을 보았고, 그 속에서 어쩌면 저물어가는 게 아니라 피어오르기 시작한 새벽을 보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편지에 위급한 상황을 알리던 것과 반대로 수도는 무척이나 한적하고 조용했다. 반란의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지도, 험상한 물색은 머리털 끝만큼만치도 보이지 느껴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일상 日常’ 이었다. 저잣거리는 서로 농을 던지기 바쁜 아낙네와 가을 수확을 위한 농기구 따위를 구매하려 나온 장정들의 우스갯소리로 소란스러울 따름이었다. 그 어디에도 위기감이란 없었다.

“수도란 생각보다 평화로운 곳이네요.”

“네가 상상하던 수도는 어떤 풍경인데?”

“글쎄요……, 무어랄까……, 아무래도 낯선 곳?”

“어떤 곳이든 처음 가보면 낯설기 마련인걸. 그래서 너는 이 도시가 마음에 들었니?”

마음에 든다라……, 제 주위로 흘러가는 풍경들을 바라보며 스오우 츠카사는 대답을 뜸 들였다. 든다 안 든다, 평을 내릴 것도 없이 아직은 이 도시에 대해 뭘 몰라도 한참은 몰랐다.

“마음에 들지 않아?”

“그건 아니지만……”

길목마다 세워진 탄탄한 담의 주변머리마다 움츠러들어 있는 응달이라든가, 그 응달 위로도 자그맣게 피어오른 이름 모를 노란 들꽃이라든가, 제 귀를 따갑게 때려오는 웃음소리들은 충분히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못내 마음 한켠이 시리고 허전한 것은 사실로,

“마음에 들 것 같아요.”

“같아? 든 건 아니고?”

“아직은 잘 모르니까요. 천천히 알아가야죠. 이 도시도, 저도…… 그치만 왠지 정을 붙여선 안 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째서?”

정이 들면 나중에 이별할 때 또 슬퍼지고 말 테니까……, 혼잣말에 가깝게 나즉히 중얼거리며 스오우 츠카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창밖을 내다보는 시선이 아래로 꺾여져 있다. 더불어 내리깐 눈꺼풀이나 그에 매달린 속눈썹이 부드럽게 휘어져 있었다. 어디에 매달지를 몰라 하릴없이 풍경 속에 방임한 듯 펼쳐지는 그의 시선을 느끼며 텐쇼인 에이치는 그렇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아, 죄송해요. 형님께는 고향인 곳인데……”

“고향이랄 것도 없어. 나는 줄곧 한 풍경밖에 못 보며 지냈으니까.”

“그때도 몸이 안 좋으셨나요……?”

“이런저런 사정으로……”

“그러고 보면 바로 의원으로 가는 거죠? 여행길에 고단하셨을 텐데,”

“내가 미처 말해주지 못했구나. 츠카사.”

“네?”

“우리는 이제부터 궁으로 갈 거야.”

놀람도 잠시, 미처 되물을 필요도 없이 스오우 츠카사는 과연, 그렇구나…… 납득하고 말았다. 그의 성은 텐쇼인天祥院. 이 나라의 심장이라고 일컬어지는 그 가문의 사람이란 사실을 바보가 아닌 이상은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부터 알아차리는 게 보통으로, 여지껏 제가 허물없이 대해온 게 가히 무례할 정도로 그가 높은 곳에 위치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스오우 츠카사는 새삼스레 깨닫고 있었다.

“과연……”

“과연?”

“이 스오우 츠카사,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텐쇼인 형님은 이 나라의……”

“그렇게까지 추켜세워줄 필요도, 격식을 차릴 필요도 없어. 이전처럼 대해줘. 갑자기 거리감이 생기면 오히려 그편이 더 외로워.”

“그래도.”

“네가 그렇게까지 나와 거리를 둔다니, 차라리 이 이름을 버려버리고 싶을 따름인걸?”

“그런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텐쇼인 형님, 가문의 이름이란 중요한 거예요.”

“그렇지……”

그렇지, 그렇지, 그 말만을 각인해놓은 글을 읊듯이, 마치 그렇지 란 말만이 잔뜩 깃들어간 시 詩라도 지어 드러내듯이 그가 연신 같은 말을 웅얼거렸다. 그렇지…… 그 이름이 무어라고.

“텐쇼인 형님……”

“응?”

“제가 말이 지나쳤다면 죄송합니다. 노하신 거라면 그만 화를 풀어주세요.”

“화나지 않았어.”

“그치만 자꾸만 그렇지, 그렇지, 같은 말만 반복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정말로 그렇다고 생각해서 그렇지, 그렇지 생각한 거 뿐이야. 고마워, 츠카사.”

새삼, 이 이름에 실린 의미를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손가락만을 꼼지락거리며 창밖으로 부산스레 시선을 옮겨내는 츠카사의 뒷모습을 보면서 텐쇼인은 눈을 감는다. 아아, 곧 집이다…… 나는 집으로 돌아간다…… 도깨비의 소굴로.


황자의 십여 년만의 귀환이었다.




머리맡에 거울보다 더 반질반질 윤이 나고 참빗 살보다 가늘어서 언제든지 숨통을 날카롭게 베어버릴 수 있을 날의 칼 하나를 얹어두고,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은 아침을 부르는 주문처럼 자장가를 중얼거리며 깊은 밤이 떠나가기만을 빈다. 어서 빨리 이 밤이 날 버려버리길, 그런 나를 아침 해가 주워가주길. 남빛 하늘에 피어오르는 저 허여멀건한 구름들은 미래에 지펴놓은 내 제단의 향불인가, 그 언젠가 말한 번 쪼개어 노나본 적 없는 누군가에게 피워올렸던 향인가, 까마득하다.

나이 어린 내가 죽어 왕위에 오르길 기다리는 젊은이들과의 사투는 언제나 버겁다. 온전히 작동조차 하지 못하고 남들보다 헐겁게 박동하는 심장으로 남들만큼 제 몫을 해내기란 벅차다. 눈앞에 아른아른, 겨울도 아닌데 자꾸만 서리가 낀다. 내 눈은 유리창이 아니다. 그런데도 눈앞엔 자꾸만 때아닌 서리가 끼고 성에가 깃드는 탓에 시종 앞이 침침하다.

언제쯤 눈앞이 훤해질까. 푸른 구슬 같다던 내 눈은 지난 십 년간 묵은 먼지로 빛이 탁하다. 온전한 빛이라곤 없다. 연일 거듭된 소낙비로 거무죽죽한 하늘과도 닮은 빛이 바로 내 눈의 탓인가, 아니면 진정으로 하늘이 꾸린 탓인가.

한 번이라도 편하게 잠들고 싶어. 십년밖에 되지 않은 육신의 소년은 낯빛이 어두워 곧 죽을 늙은이와 같다, 그 앳된 얼굴에 어린 근심이란 어린아이의 것이 아니다. 그저 저 좋아하는 장난감을 못 지니게 되어 투정을 부리는 이의 볼따구처럼 부풀어 있지도 못하고, 제 원하던 간식거리를 쥘 힘조차 없어 보이는 손가락은 늘 바닥을 향해 축 늘어져 있다. 그런 마음으로 언제나 칼을 품고 살았다.

칼을 처음으로 제 품에서 풀어두던 날을 기억한다. 봄이었고 날씨가 화창해 저도 모르게 딱딱히 굳어버린 흙처럼 단단했던 뺨을 크게 부풀려가며 울었지, 제 뺨이 단단히 굳은 돌덩이가 아니라 그리 크게 부풀 수 있는 풍선이었단 사실을 그날 처음 깨달았다. 이렇게나 큰 울음소리를 내가 낼 수 있었구나, 그토록 웃어볼 수도 있었구나, 이토록 편하게 잠에 들 수 있구나.

그 날은 머리맡에 칼을 놓는 대신 제 곁에 작은 아이 하나를 놓아두었다. 세상 시름 하나 그 어디에도 깃들지 않고, 어느 곳에도 녹녹한 때가 끼지 않은 말간 얼굴로 제 곁에서 잠들었던 어린 양의 얼굴을 기억한다. 제게 바쳐진 저의 어린양……

어느새 자랐구나, 네가 이렇게나 튼튼하게 자랐구나, 나를 위해 쓰일 어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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