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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바스

[황흑/키세쿠로] 전망 좋은 방 - 2

엘리스.aliceeli 2017. 8. 2. 20:33

전망 좋은 방

키세 료타 X 쿠로코 테츠야


* AU 설정 주의.

* 눈이 보이지 않는 쿠로코와 그런 쿠로코를 만나게 된 키세의 이야기


*


이 집의 첫 인상은 서양영화에 나오는 대부호들이나 살 것만 같은 집이었다. 주거지는 아니고 근교에 적당히 마련해둔 쉼터같은 느낌의 별장같은 건물로 실거주용이라기엔 실용성이 떨어져보이는 집이었다. 하기사, 있는 사람은 뭘 해도 다 하겠지. 그들에게 집의 실용성 따위는 중요치 않다. 그저 자신을 있어보이게 만드는 적당한 장신구와 같은 용도다. 이따금 관리인을 보내 청소를 하고 허세를 부리기 위해 여름날 친구들을 불러 모아 파괴할 수 있는 저만의 왕국이 필요한 것이지 밤잠을 자기 위해 지친 몸을 누일 장소란 아니다, 이 말이었다.


주인은 외출 중으로 현관의 도어락은 비밀번호로 해제하면 될 거라며 사양인은 문자를 보내어왔다. ‘타인에게 이렇게 알려줘도 괜찮은 거에요?’ 하며 빈정거리는 자신을 향해 그는 가보면 알거라는 말로 일축했다. 키세 료타는 곧 착신되어온 문자의 내용을 확인하면서 그의 말에 수긍하고야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암호만 해도 장장 5개나 되었으니 말이다.


콜택시를 타고 도착한 주소지에는 커다란 대문이 있었다. 꽤 압도적이었다. 쇳덩이로 뼈대를 만든 괴물 혹은 쇠로 이루어진 뼈를 지녔던 공룡의 화석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키세 료타는 대문에 암호를 입력했다. 그 집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마치 퀘스트를 하나씩 마스터하는 일과 유사했다. 던전을 헤매는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문을 열자고 암호 두 개를 입력했고 건물로 들어가기 위해 하나를 쓰고 그 안으로 들어서니 집 내부로 들어서기 위한 자동문을 열기 위해 암호를 하나 더 집어넣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암호 하나가 더 남기는 했지만, 언젠가 쓸 일이 있으니까 제게 쥐어준 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 개의치 않기로 했다.


그리고 부재중인 제 주인-의뢰인-을 기다리며 키세 료타는 이 전망좋은 방을 구경하고 있던 게 일의 경과다.


제법 무거운 침묵 사이로 그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마치 씨앗이 발아하듯이 느릿느릿. 자는 사이에도 몰래 몰래 자라나는 식물의 성장과도 같은 속도로 느릿 느릿, 뿌리가 될 줄기가 땅을 헤칩고 온 몸으로 비비적대며 제 길을 찾듯 그는 손으로 벽을 짚으며 서서히 걸음을 자라게 했다. 발소리가 그려내는 궤적.


우선 사과할게요. 무례하게 강아지부터 찾고 말았네요.”

, 나도 예의바르진 않았으니까 상관없어요.”

감사합니다.”


벽면을 가득 수놓은 이름 없는 양장본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그는 천천히 책장의 가운데까지 몸을 옮겼다. 그의 말대로 정말로 앞이 보이지 않는 건지 거짓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의 의도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지만, 그와 나는 정면으로 마주선 꼴이 되었다.


아카시군.”

투명한 말마디,


제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테니 전화통화는 편하게 하고 오세요.”

괜찮겠어? 테츠야?”

물론이죠.”


하지만 단호했다. 아카시라 불린 사내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제 내부마저 꿰뚫고 후벼낼 듯이 저를 사나운 시선으로 복안했다. 이윽고 그는 계단을 올라 이층으로 사라졌고 거실에는 그와 나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당연히 그도 말이 없고 나도 말이 없어 우리 사이에 침묵을 입은 호흡만이 멤돌 거라 생각했는데,


이름이 뭔가요?”

그가 돌연 이름을 물어왔다. 고요에 균열이 생긴다.


보통은 자기 이름부터 말하지 않나요?”

실례했습니다. 쿠로코 테츠야(黑子 テツヤ)라고 합니다.”

테츠야?”

.”


그는 등을 꼿꼿하게 세우며 앉아있었다. 참으로 바른 자세였다. 키세 료타는 덩달아 경직되어있다가 피차 이 사람에겐 제가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하니 긴장이고 자시고 할 게 사라지고야 말았다. 편안하게 소파에 등을 기댄다. 무게가 실린 가죽이 눌리며 삐걱이는 마찰음을 내었다.


쿠로코 테츠야……

흔한 이름이라고 생각하셨나요?”

뭐 대충? 실로 흔하니까요. 성이야말로 특이하네요.”

그런가요?”

. 성은 마치


여느 영화에 나올법한 이름이지 않은가. 대부호의 저택에서 금지옥엽 바람에 불면 민들레 솜씨처럼 날아갈까 두려워 고이고이 온실 속의 화초보다도 더 비밀스럽게 소중한 보물함에서 고이고이 간직한 진주처럼 숨겨 기른 막내딸, 으레 사기결혼의 심복으로 심어둔 앞잡이와 사랑에 빠져서 손을 잡고 저택에서의 야반도주를 감행하는 어디에나 있을법한,


어디에나 있을법한,”


여자의 이름.


이름이죠? 성도 이름도.”


오히려 흔해빠진 조합이라 기억에 오래 남을 것만 같았다. 참으로 여자아이같은 성에 참으로 남자아이에게 어울릴법한 이름의 조합이라면,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다.


, 본인이 그렇게 말하니 부정은 하지 않을게요.”

료타는 제 집에서 그러듯 자연스럽게 다리를 꼬았다. 그래서 소파 소리가 희미하게 허공을 흔들었고,

다리를 꼬았군요.”

쿠로코 테츠야가 말했다.

안 보이는 거 아니였어요?”


료타는 미간을 찌푸리며 뺨을 씰룩였다.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꼬았던 다리를 자연스럽게 풀며 그를 응시했다. 그는 조용했고 고요했다. 아무런 응답도 없이 허공만을 응시하듯, 저 멀리 시선을 보내듯이 그저 앞만, 그렇게 앞을, 자신을 바라보듯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료타는 머리를 굴린다. 그는 분명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손으로 벽을 짚으며 걸음을 올렸고 마주한 눈동자엔 초점따윈 고여있지 않았다. 오히려 희미하고 흐릿했다. 지금 자신을 놀리는 건가 싶었다. 착오라더니어쩌면 맹인이라는 핑계로 저를 속여먹고 있나? 싶어 손을 들어 흔드려다가 만약 저자가 진실로 자신을 상대로 술수를 부리고 있다면 그야말로 천재적인 연기자가 따로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연기라면 내가 아니라 당신이야말로 이 강아지에 어울릴지도 모르겠네요, 키세 료타는 속으로는 조용히 중얼거리며 밖으로는 소리 내 혀를 찼다.


당신은요?”

?”

.”

당연히 보이죠.”


무슨 황당무계한 질문인가 싶었다. 료타의 대답은 그야말로 면박스러웠는데,

아니, 그거 말고 당신 이름말이에요.”

그는 당황함 일끗없이 말을 이었다. 오히려 그 대답에 아차 싶었던 키세 료타였다.

당신이 앞을 볼 수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어떻게요? 당신은 앞도 안 보이는데 나를 알 수 있죠?”

제법 무례한 질문이었다. 그는 화를 내지도 미간을 찌푸리지도 웃거나 그 어떠한 표정변화도 없는 그 얼굴로 나지막이

이 방의 전망을 보고 있었잖아요."

말했다. 존재감이 희미한 그 남자는 감정조차 희미하고 투명하게 제 목소리에 풀어내고 있었다. 수채화보다도 더 흐리고 투명하게.

그걸 어떻게 알죠? 하는 질문에 그는 제가 들어오기 전부터 전망을 보고 있었으리라 답한다.


당신이 고개를 돌리는 소리가 들렸거든요.”

기묘한 사람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수상쩍은. , 키세 료타가 할 말은 아니었다. 제 처지야말로 수상쩍었으니 말이다. 속내를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상대의 성격과 특질을 파악해서 그에 맞는 강아지가 되어야하는 키세 료타의 입장으로서 바라본 그는 주인으로 받아들이기엔 꽤 난해한 사람이다 싶었다. 어쩌면 그들의 착오가 제게 유리하게 작용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통화가 끝나셨나요?”

아아. 물론이야.”

그렇군요. 어떻게 되었나요?”


키세 료타는 투명인간이나 다름없이 대화에서 배제된 상태로 두 사람간의 대화가 이루어졌다. 엄연히 이 화제의 중심엔 제가 존재하고 있는데도 마치 이 공간엔 제가 없는 듯 구는 빨간머리의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있는 힘껏 노려보고 있는데 돌연 그가 저를 향해 고개돌리는 바람에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맹수 앞에 주눅 든 개새끼처럼 저도 모르게 깨갱하는 소리 한 번 짖어보지도 못하고 본능적으로 시선을 피해버리고 말았다. 왜지……?! 스스로도 혼란스러운 와중에,


착오를 해결하기로 했어. 테츠야.”


그의 목소리만큼은 뚜렷하게 제 귀를 관통해왔다. 착오의 해결이라, 그렇다면 자신을 반품한다는 소리일까. 아아, 역시 이 곳에 오는 게 아니었다. 좀 더 페이가 적더라도 석 달 전에 저를 입양했었던 그녀에게 가는 편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또 스토커처럼 따라붙는 바람에 떼어내느라 일주일 간 타지로 귀향살이를 해야겠지만. 헛걸음을 쳤다 생각하니 일당이라도 받아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 외진 곳까지 오느라고 한 고생이나 콜택시 비라든가. 부자라면 제게 던져주는 하루 품삯 정도는 달갑진않더라도 던져주기는 하겠지.


어떻게 하는데요? 돌려보내기라도 한다는 거면 일당이라도 주면 좋겠는데 말이죠.”


자신을 고까워하는 그의 감정이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쿠로코 테츠야는 여전히 희미한데 반해서 붉은 머리의 남자는 너무도 적의가 완연했다. 어울리듯 어울리지 않는 한쌍의 조합,

그렇군요. 확실히 저는 강아지를 입양하기로 했었고, 당신도 입양……이 되는 건가요?”

대충 얼버무리자 싶었다.

그런 셈이죠. 페이가 높다길래 부르는 곳을 다 거절하고 여기로 왔는데 말이죠. 허탕이죠.”

허탕이군요……?”

오고 가는 시간하며 차비하며. 허탕이 아니면 뭐겠어요. 사람 약 올려요?”

일당이라면 계좌번호를 남겨. 바로 입금할테니. 아니면 현금이


아주 약간 도발을 했을 뿐인데 그는 언짢아하며 도발에 반응해왔다. 이쪽은 언제나 현금이다. 계좌를 통해 거래내역을 남기는 일 따위를 할 리가 없지 않나 싶어 키세 료타는 적당히 페이를 치자 싶었다. 그때,


아카시군.”

하고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는 그의 팔을 쿠로코 테츠야가 붙들었다.

괜찮아요. 일당을 지급할 필요는 없을 거 같아요.”

테츠야?”

지금 사람 물 먹여요?!”

아니요. 일당을 줄 필요가 없으니 주지 말라는 겁니다.”


차분한 목소리는 단호한 어조를 품속의 칼처럼 지니고 있었다. 함부로 말을 잘라선 안 될 것 같아 뒷말을 기다리자,


당신을 입양해드리겠다는 뜻이에요. 강아지씨.”

강아지씨?!”

잠깐, 기다려. 테츠야!”

어차피 제 안내견을 구하던 거였으니 제가 정하면 되는 거겠죠. 아차,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말동무까지 겸해주면 좋겠네요. 강아지씨.”


일사천리로 착오가 해결되었다. 그는 제 말을 자르지 못하게 하면서 모두의 말은 과감히 잘라내고 있었다. 단호한 어조는 참으로 날카로운 날을 가지고 있었고,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하아?”

강아지씨.”

너무도 순식간에 일망타진, 속전속결. 일이 맺음되었다. 그렇게 쿠로코 테츠야, 그가 료타를 강아지씨로 입양하게 된 첫 날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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