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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바스

[황흑/키세쿠로] 전망 좋은 방 - 3

엘리스.aliceeli 2017. 8. 9. 23:00

전망 좋은 방

키세 료타 X 쿠로코 테츠야


* AU 설정 주의.

* 눈이 보이지 않는 쿠로코와 그런 쿠로코를 만나게 된 키세의 이야기


*



이 전망좋은 정경을 완성시키는 건 바람이 불 때마다 채 말라붙지 않은 유화물감처럼 겹칠되는 녹음과 그 아래의 짙은 그림자를 새기듯 바르는 붓질이라고 키세 료타는 생각했다. 시시각각 눈을 깜빡일 때마다 저를 속이길 기다렸다는 양 변해가는 정경들을 바라보고 있다 보면 실로 지루하면서도 거듭 바라보게 되는 어떠한 매혹적인 이끌림이 제 안에서 요동쳤고, 그래서 그는 원치않으면서도 자꾸만 이 거대한 유리창을, 뻗어나가는 잡풀이 만드는 녹색의 길을, 그 끝에 지평선에 걸려있는 쓸모없는 경계선 따위를 눈감고 떠올릴 수 있게끔 훈련하는 사람처럼 바라보고 바라보게 되었다.


쓸모없는 일들에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이 말은 어찌 보면 무의미하지만, 표준온도를 넘어가는 여름의 열대야처럼 평소보다도 낮은 노동강도를 뽐내며 몸만큼은 지나치게 편함을 누리고 있다는 말이 된다.


할 일이 적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이 사람은 외출조차 자유로이 하지 않았다. 충분히 그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골방 구석에 웅크리는 먼지처럼 넓고 넓은 방에서 아주 약간의 면적만을 차지한 채 간략한 하루를 보낸다. 공식처럼 압축되어버린 하루. 너무도 평이했다.


그 어떠한 행위도 없던 자신에게 대가를 치르겠다며 제가 얼마를 부를지도 불안해하지 않고 제 앞에서 평소처럼 값을 치르듯 막힘없이 지갑을 열려던 빨간머리의 그를 생각했다. 그 빨간 머리의 사내와 제가 입양된이 집의 투명한 사람, 쿠로코 테츠야는 누가 보더라도 평범한 친우(親友)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형제에 가깝달까…… 타고난 천성이 다른 온도를 지니고 있을 뿐 전체적으로 한군데씩 요목조목 뜯어보면 몇 도 정도 모자른 서로같이 생김세의 차이가 보였지만, 전체적으로 슬쩍 훑어만 본다면 두 사람은 외형이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단정한 행색이나 비슷한 헤어스타일 때문이라 단순하게 생각하기에는 몇 도가 더 존재했다.


아무튼 두 사람이 친근한 사이인건 확실했고, 그만한 사람에 이렇게나 끝없이 전망좋은 방을 가진 집을 쿠로코 테츠야는 소유하고 있다. 뭣보다도 제게 제시해온 계약금액만 생각해보더라도 지칠 때까지 돈을 쓰고 돌아다녀도 모자라 마지않을 사람인데, 단순히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는 타당하지 않았다.


불과 며칠 전 제가 처음 이 집에 왔을 때만 하더라도 에서 내부로 들어오고 있지 않았는가? 밖에서 들어올 수 있다는 건 밖을 향해 내부로부터 나갔다는 조건이 선제되어야만 했다. 그러니까 그는 나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에서 나가지 않고 너무도 조용하게 제 삶의 공식으로 시간을 나누고 나누고 나누고 있다, 고 볼 수가 있었다.


사실 자신이 이렇게까지 그의 일상에 대해서 깊이 관철할 필요는 없었다. 개입할 생각도 없었지만, 그의 개로 입양이 된 제 처지를 생각해보면 별개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관여하지 않을래도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엄연히 그가 제 시간을 사버렸기에 그의 시간과 저의 시간은 합집합이 되어버렸다. 갑자기 궤도를 바꾸게 된 항성처럼 그가 지닌 궤도를 따라 돌 수 밖에 없는 위성이 자신이었다.


물론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관해서는 그에게 선점권이 있었고, 제가 거기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었다. 뭣보다 이전의 주인들에게 그래왔듯이 키세 료타는 주인이 된 여자의 비위를 적당히 맞추며 그들의 원하는 제대로 된 남자친구연인을 연기해주었고 원한다면 진심으로 포장한 그럴싸한 거짓도 내보여주었던 것이다. 그 경우들 모두 상대에게 맞추었지만 크게 불만은 없었다. 다들 어떠한 목적이 있었고 움직임이 있었다. 개척된 도로를 매끄럽게 달리는 스포츠카처럼 자신은 질주하기만 하면 되었고, 녹록치 않은 풀들을 뜯어가며 길을 개척할 필요성은 단 1%도 존재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 하잖아…… 지루하다. 고루하다. 소파 위에 올려둔 제 몸을 뒤척이며 키세 료타는 맞은 편 소파에 앉아 보이지 않는 책을 읽고 있었다. 끈질긴 응시, 며칠 지켜본 바로는 그는 집중력이 꽤 좋은 사람이었다. 아니면 책을 무척이나 좋아하거나. 끼니를 거를 정도로. 책을 읽는 건 좋았지만, 저마저도 끼니를 거르게 하는 건 불합리했다. 당신의 강아지로 키우겠다고 정했으면 강아지가 지내기 적합한 상태를 만들어달라는 말이다. 이쯤되면 당신의강아지가 아니라 유기견이 되어버릴 기믹이다.


그리고 지금은 점심시간을 한참 전에 넘긴 오후 342분으로 키세 료타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허기가 몰고 오는 가장 빠른 감정은 불쾌감이었다. 어제는 그나마 2시 이전에 불현 듯 밥생각이 난 건지 제가 떠오른 것인지 모르겠지만, 브런치라고 부르면 적당할 시간에 먹었기에 불만은 없었지만, 오늘은 완전히 저를 잊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방임되어 본 게 얼마만인가, 이런 불쾌한 감정과는 재회의 기쁨따윈 없으니 만나고 싶지 않았다. 키세 료타는 그래서,


저기요.”

하고 불렀다. 흔적 하나 없이 말이 흩어진다. 사라졌다. 그래서 그는 조금 더 큰 소리로,


저기~쿠로코 테츠야씨~”


하고 제법 정답게 그를 불렀고, 쿠로코 테츠야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결국 키세 료타는 책에 몰두한 그에게 다가가 강아지처럼 앞발을 들어 그의 책을 낚아챘다. 보통의 강아지라도 배가 고프면 끼잉끼잉거리며 주인에게 다가가 얕게 발톱을 세워 주인을 북북 긁을테니 책을 빼앗은 정도에서 멈춘 저는 꽤 신사적이지 않은가?


단호한 몸짓으로 굳어있던 그가 제법 놀란 듯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는 게 보였다. 이윽고 망각하고 있던 제 강아지에 대해 인식한 듯 서서히 긴장을 푸는 게 보였다. 단단하게 굳어있던 선들이 부드럽게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요?”

무슨 일이냐니, 진심인가. 애완동물을 돌봐야지. 내가 정말 개였다면 동물학대로 고소감이다. 신고에 들어가야한다.

개밥 안 줘요?”

…… 그렇네요.”

하아? 그렇네요?”

까먹어버렸네요. 미안합니다.”


제가 정말 강아지였냐면 어쩔 셈이였냐고 물으니 그는 너무도 무미한 목소리로,

저는 자유식을 생각했어요.”

라고 대답해왔다. 하아……? 키세 료타는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그럼 나도 자유식이다, 이 말인가요?”

, 그렇게 되겠네요. 어쩌면 그게 더 편할지도 모르겠어요. 제 손으로 챙겨먹을 수 있는 강아지라면 사료통이 비었는지 신경쓰지 않아도 되고……


이쯤되면 엄연한 학대다, 키세 료타는 그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는데,

뭣보다 대화가 된다는 게 좋네요. 말을 할 수 있잖아요.”

하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왠지 모르게 소외감을 만난 기분이 들었다. 한참 따돌려짐에 익숙해진 체념에도 가까운 소외감이랄지……


그가 책장을 더듬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키세 료타는 그를 부축하기 위해 손을 뻗다 그만두기로 했다. 그에 몸에 손을 댄다는 건 기원도 알 수 없는 금기와도 같았다. 그러니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에게 손을 대어선 안 된다고 생각해서 키세 료타는 제가 오기 전과 마찬가지로 늘 살아왔듯 천천히 벽을 짚어 제 위치를 가늠하고 어둠 속에서 서서히 미로를 풀어나가는 사람처럼 부엌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발소리가 작았고, 그 뒤를 따르는 발소리는 제법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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